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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마거릿 대처 퇴진과 박근혜 대통령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1.30 16:58

수정 2016.11.30 16:58

[fn논단] 마거릿 대처 퇴진과 박근혜 대통령

'철의 여인'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2013년 4월 8일 사망한 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이런 그가 이끌었던 집권 보수당으로부터 '팽'을 당해 총리직을 사임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퇴진을 보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게 공허한 말이 아니다.

1979년 5월 총리에 취임한 대처는 3년 뒤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전쟁을 매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승리로 이끌었다. 1983년 재선에 이어 1987년 삼선에 성공했다. 잘나가던 그를 멈칫하게 만든 게 경제였다.
집권 2년차인 1981년부터 호전되었던 경제가 1989년부터 하강세로 돌아섰다. 1988년 5%로 정점을 찍은 경제성장률이 1989년에 2%로 급락했고 이듬해 1%대로 떨어졌다. 여기에다 3선으로 너무 자신감이 지나치게 된 그가 내각제임에도 제왕적 통치스타일을 보이면서 그를 지지하고 따르던 핵심 각료들과의 갈등이 불거져나왔다. 또 보수당 지지자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이 지방세(인두세) 개정과 인상이었다.

원래는 주택 소유자만이 이 세금을 납부했는데 대처는 지방정부의 예산급증을 막고 모두에게 평등한 과세원칙을 내세워 임차인들도 이를 내게 했다. 1988년 7월부터 이 세금이 도입된 후 영국 곳곳에서 납세 거부 운동이 펼쳐졌고 1990년 3월 말 런던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기 보수당의 아성이던 선거구에서 치러졌던 보궐선거에서 보수당이 참패했다. 집권 보수당 각료들은 대처에게 이 법의 재개정이나 철회를 요구했으나 원칙의 정치인 대처는 거부했다.

'선거의 여왕'을 물러나게 만든 결정타를 그의 핵심 각료가 날렸다. 제프리 하우는 집권 1기 재무장관으로 대처의 경제정책을 만든 핵심 공신 중 한 사람이었다. 이어 집권 2기(1983~1987년)에 그는 외무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대처에게 계속해 인두세 같은 정책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오히려 여성 총리는 그를 부총리라는 한직으로 내보냈다. 결국 그는 1990년 11월 13일 하원에서 '충성의 갈등'이라는 연설에서 대처에게 강펀치를 날렸다. 비록 총리가 일부 잘못된 정책을 시행해 왔지만 각료로서 총리를 지지하는 게 맞다. 이런 두 충성심이 서로 갈등을 겪고 있다고 고뇌를 토로했다. 이 연설 1주일 후 벌어진 보수당 당수 경선에서 대처는 1차에서 과반을 얻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기를 다졌으나 보수당 원로들이 그를 설득했다. 이미 보수당이 당신을 버렸기에, 여기에서 물러나는 게 총리에게도 명예롭다고.

정치인들이 자주 착각하는 게 자신들이 물러날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다. 11월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타오른 촛불시위에서 남녀노소 시민들은 이미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다.
11월 29일의 3차 대국민담화에도 상당수 국민들은 그를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롤모델로 내세웠던 원칙 있는 여성 지도자, '선거의 여왕'이었던 대처의 퇴진을 알게 된다면 느끼는 게 있을까? 시간은 시민의 편이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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