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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사대부 상인, 토정 이지함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2.19 17:22

수정 2016.12.19 17:22

[fn논단] 사대부 상인, 토정 이지함

사대부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했던 토정 이지함은 기인(奇人)으로 이름났다. 율곡 이이는 이런 토정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인재로 정부에 등용시킨다. 비록 서로 추구하는 길은 다를지라도 언젠가 나라에 보탬이 될 재목임을 알아본 것이다.

율곡이 쓴 '석담일기'에는 토정에게 성리학을 권하는 장면이 있다. 토정은 "나는 욕심이 많아 성리학을 못한다"고 말했다.
율곡이 "명예와 이익과 놀이와 여색은 선생이 좋아하지 않으니, 무슨 욕심으로 학문에 방해가 되오" 하니, 토정은 "어찌 명리 성색만 욕심인가. 마음이 가는 곳이 천리(天理)가 아니면 모두 욕심인 것이다. 내가 스스로 방종하는 것을 좋아하여 규칙으로 단속하지 못하니 이것은 물욕(物慾)이 아닌가"라고 답했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이지함을 제갈량에 비하는데 어떤 인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물건에 비유하자면 기이한 꽃, 이상한 풀, 진귀한 새, 괴이한 돌과 같고 옷감이나 나물 혹은 곡식 같은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율곡은 성리학을 도외시하고 장사에 몰두하는 토정이 못마땅했기에 제갈량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했던 것이다.

토정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일엽편주를 타고 풍랑 피해 없이 세 번씩이나 제주도를 다녀왔다든지, 마포 강변에 토정이라는 흙집을 짓고 거처하며 갓 대신 철모를 쓰고 식사 때는 이를 솥으로 사용했다는 등등. 또 장인의 사망을 예견했고 아산 현감 재직시 해일이 일어날 것이란 것을 미리 예고하여 많은 주민을 구했다는 등 그래서 그는 한 해의 신수를 점치는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왔다.

무엇보다 토정이 별난 것은 양반으로서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이황, 이이가 활약하던 16세기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가 엄격해 사대부가 미천한 상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어려웠다. 더욱이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6대손으로, 조카 이산해와 이산보가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낼 정도로 뼈대 있는 유교 집안 출신이었다. 서경덕 문하에서도 수학했지만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직업의 귀천을 넘어 어부, 농부, 상인, 노비 등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었다. 또 상인이 됐음에도 그는 번 돈을 가난한 자를 위해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어우야담'에는 토정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손수 상인이 되어서 백성을 가르치고 맨손으로 생업에 힘써 몇 년 동안에 수만석에 이르는 곡식을 쌓았다. 그러나 모두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준 다음 소매를 펄럭이며 떠나갔다. 바다 가운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그 열매가 수만개나 되었다. 그것을 잘라 바가지를 만들어 곡식을 사들였는데 거의 천석에 이르렀다."

토정 생전에 조선사회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여년 지난 후 그의 사고는 박지원, 박제가 등 중상주의 북학파로 전해졌다. 해상교역과 양반도 상공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이를 실천했던 인물로 토정을 거론했다.
책만 보던 양반 허생이 어느 날 홀연 집을 나가 상업으로 큰 돈을 번다. 이어 변산의 빈 섬에 도독들을 데리고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섬에서 돌아온 허생은 빚을 갚고 남은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는 박지원이 쓴 '허생전'도 왠지 토정 이지함을 연상시킨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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