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재훈 칼럼] "돈 줘도 패고 안줘도 패고"

이재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1.18 17:11

수정 2017.01.18 17:11

기부했다 뇌물죄 덮어쓴 기업들.. 동계올림픽.창조경제도 걸릴 판
'팔비틀기' 막을 입법은 언제 하나
[이재훈 칼럼] "돈 줘도 패고 안줘도 패고"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 중인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질주가 거침없다. 궁극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죄 입건을 겨냥한 것이겠지만 기업들을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다. 특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재계는 시쳇말로 멘붕에 빠졌다. 영장 청구보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낸 출연금을 제3자 뇌물로 규정한 특검의 판단에 더 놀랐다. 특검은 한술 더 떠 "53개 기업의 출연 행위(774억원) 모두를 뇌물 공여로 보기로 했다"고 밝혔다. 강요받은 기부를 뇌물로 본다면 기업은 앞으로 기부나 성금을 통한 사회공헌 활동을 포기해야 한다.


재단에 출연한 53개 기업이 자신의 현안에 대한 청탁을 목적으로 박 대통령 또는 최순실씨에게 먼저 접근해 출연금을 납부했다고 볼 수는 없다. 검찰 또는 특검의 수사 결과 아직까지 구체적인 청탁을 한 기업은 드러나지 않았고 상당수 기업은 청탁할 만한 현안 자체가 없다. 그보다는 재단의 출연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와대는 대기업과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출연을 요구했고 전경련은 대기업들에 자산 규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출연금을 배분했다.

대기업의 기부에는 공식이 있다. 삼성그룹이 100원을 내면 현대차는 60%, SK는 50%, LG는 40%를 내는 것이다. 두 재단 출연금도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 재계 관계자는 "만약 출연금이 뇌물이라면 청탁할 사안의 경중에 따라 관련 기업의 출연 규모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압박에 못이겨 최순실이 지배하는 재단인 줄도 모르고 돈을 낸 것이 왜 뇌물이냐는 것이다.

박근혜정부 들어서 기업들이 내는 기부금, 성금 등 준조세가 크게 늘었다. 청년희망펀드 880억원, 창조경제혁신센터 투.융자.보증금 7227억원, 평창동계올림픽 후원금 8400억원, 세월호 성금 942억원 등 단위가 굵직굵직하다. 최순실 일당이 동계올림픽 관련 사업과 창조경제사업에서도 돈을 빼먹으려 했다는데 이런 기부금은 모두 뇌물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지난해 5월 돌연 사퇴를 통보받았다. K스포츠재단 출연을 거부해 밉보였다는 게 정설이다. 기업들은 '괘씸죄'를 피하려 보험 들듯이 기부를 한다. 그랬더니 이번엔 기부를 했다고 죄를 묻는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18일 30대그룹 간담회에서 "뭘 주면 줬다고 패고 안주면 안줬다고 패니 기업은 중간에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특검 측은 삼성 이 부회장 영장 청구에 대해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결기로 읽힌다. 그러나 강요받은 기부까지 처벌하면 정의가 세워질까. 다음 정권에서는 '수금통치'가 완전히 없어진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권력이 돈 달라고 기업의 팔을 비틀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준조세 금지법, 비자발적 기부금 방지법 혹은 기업판 김영란법이 그것이다.

지금 국회에는 이런 준조세 금지법이 여럿 발의돼 있다. 유력한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최근 준조세 금지법을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런 법안이 처리될지 믿음이 안간다. 정치권이 워낙 기업 들볶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국회가 기업에 총 1조원의 돈을 뜯어내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법안을 지난 연말 통과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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