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차장칼럼] 빚, 무서움을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이세경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1.31 17:34

수정 2017.01.31 17:34

[차장칼럼] 빚, 무서움을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신용카드를 만들면 현금 1만원을 그 자리에서 내어주던 때가 있었다. 외환위기(IMF 구제금융) 직후 하고 싶은 건 너무 많고 돈은 궁했던 학생들에겐 빠져나갈 수 없는 유혹이었다. 줄지어 서명을 하고 빳빳한 1만원권 지폐와 반짝이는 플라스틱 카드를 건네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만원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카드 한 장만 있으면 통장에 돈이 한푼 없어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넣으면 원하는 금액을 누르는 대로 뱉어냈다.
그야말로 '도깨비 방망이'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결말은 참담했다.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난 대금을 이 카드, 저 카드로 돌려막고 친구 것까지 빌려서 막다 한꺼번에 신용불량자(채무불이행자)가 된 20대가 수두룩했다. 신불자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때였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부모 앞에 무릎을 꿇은 친구도 여럿 있었다. 아버지가 대출을 받아 아들의 연체대금을 갚는, 빚이 대를 잇는 광경도 보았다.

그때 아버지가 했다는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만큼 호되게 당했으니, 평생 빚 무서운 줄 알고 살겠지. 그 값이라고 생각하자."

그 후로 20년이 흘렀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한국신용정보원에 따르면 신용카드를 이용하는 25세 이하 청년층의 채무연체율이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5세 전후 다중채무자의 채무연체율은 6%에 달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대의 금융이해력 점수는 62점이다. 한국인 평균 금융이해력(66.2점)보다 낮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정한 최소 목표점수(66.7점)에도 한참 못 미친다.

송구하지만 그때 아버지의 말은 틀렸다. 20대에 빚이 무서운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는다. 취업을 할 때도, 차를 살 때도, 결혼자금·주택자금이 필요할 때도 신불자 '낙인'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현재 제1금융권에서 7∼10등급자의 신용대출 금리는 최고 12%대까지 오른다.

정부는 우선 대학생과 사회초년생에게 현금서비스와 카드론의 위험성, 신용등급 관리에 대한 교육을 시작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절을 겪고 이제 부모가 된 40대는 덜컥 겁이 난다. 부모와 양가 조부모의 여섯 주머니를 차고, 갖고 싶은 건 쉽게 손에 넣는 요즘 아이들. 고령화사회에서 오랜 불황기를 감내해야 할 세대다. 그들이 20대가 되면 과연 사정은 나아질 것인가.

송구하지만 20대 금융문맹을 이제 와 없애보겠다는 정부의 결정은 너무 늦었다. 지난 2003년 신불자의 굴레를 쓴 20대는 50만명에 달한다.
빚에 호되게 쫓겨 꿈을 잃은 그들의 삶은 사회.경제에 큰 손실을 입혔다.

저금통에 세뱃돈을 우겨넣는 아이를 보며 똑똑하게 돈 쓰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다.
책임은 결국 부모의 몫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듯.

seilee@fnnews.com 이세경 금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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