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yes+Leisure] 별과 조국을 사랑한 청년, 그가 남긴 詩와 인생이 오롯이..

조윤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2.02 19:12

수정 2017.02.03 09:52

서울 청운동에 자리잡은 윤동주 문학관 가보니
최근 영화.예능프로 통해 재조명
1년간 10만명 이상 다녀가 7~8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 등 시인의 고민담긴 작품.기록 전시
[yes+Leisure] 별과 조국을 사랑한 청년, 그가 남긴 詩와 인생이 오롯이..

]쉽게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시인 윤동주를 기념한 곳이니까. 그런데 의외로 많이 몰랐다. 두 번의 거절 끝에 탄 택시는 그를 기리는 문학관을 약 1㎞ 이상 남은 곳에 내려줬다. 내비게이션상 이 근처 어디일 거라는 말과 함께.

영하의 찬바람을 맞으며 서울 청운동을 헤맨 끝에 만난 의무경찰은 멋쩍게 도리질을 하며 동료에게 물었다. 네댓번의 물음 끝에 되돌아온 답은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한참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흩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숨차게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면서도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주위가 지나치게 한적했다. 스마트폰 지도 앱을 보니 길은 쉬웠다. 오르막길을 그냥 쭉 따라가면 됐다. 그럼에도 계속 의심이 됐다.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하나, 최근에는 영화 '동주', 인기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으로 찾는 이가 더욱 많아졌을 테니 눈에 띄는 안내판 몇 개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 20분을 걸었을까. 낡은 옛집들을 지나 드디어 만난 흰색 건물 하나. 가까이 가서야 알아본 '윤동주문학관'이었다.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에는 시인의 고향인 북간도 용정에서 가져온 나무로 만든 우물(모형)이 전시돼 있다.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에는 시인의 고향인 북간도 용정에서 가져온 나무로 만든 우물(모형)이 전시돼 있다.

윤동주문학관 뒤편 시인의 언덕에 있는 '서시' 시비.
윤동주문학관 뒤편 시인의 언덕에 있는 '서시' 시비.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생각보다 작다. 7~8평이나 될까.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했지만, 1년에 10만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최근에 방영된 '무한도전' 덕분에 주말에는 더욱 붐빈다고 했다. 안내데스크를 지나니 시인의 고향집 우물을 감싸고 있던 목판이 첫눈에 들어왔다. 이를 중심으로 사방에 그의 연대기와 친필 원고, 짤막한 시구, 그가 애장했던 시집과 문학잡지, 그리고 단 하나 남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 전시돼 있었다.

그러나 실망하기는 이르다. 문학관에서 처음 만나는 제1전시관을 지나면 열린 공간인 제2전시관, 짧은 그의 인생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는 제3전시관이 숨겨져 있으니 말이다.

전시관에서 만난 윤동주는 섬세한 완벽주의자였다. 모자에 진 작은 주름 하나도 견디지 못한 사람, 영혼의 구김도 참을 수 없었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인생마저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바랐으리라.

사실 그는 민족시인으로 이름이 높지만 독립투쟁의 최일선에서 장렬하게 싸운 투사도, 당시 이름이 높았던 시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찬란한 것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시로 남긴 깊은 자아성찰에 있다. 총과 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시를 통해 암흑의 시대를 걷고 있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소망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담아냈다.

그의 이런 정신이 담긴 문학관의 키워드는 '우물'이다. 그의 고향집 우물은 특별하다. 이 우물 옆에 서면 동북쪽 언덕으로 윤동주가 다닌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이 우물을 기억했고 그의 대표작 '자화상'을 낳았다. 그의 기억 속 우물에는 밝은 달과 구름이 흐르는 하늘이 펼쳐졌고, 파란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다. 우물 속 비친 사나이는 자신이다. 험한 세상에 맞서 아무것도 못하는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다 가여워 돌아오고, 다시 미워져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리워진 그런 이다. 그를 시인으로 키워낸 우물이었기 때문일까. 문학관은 우물을 본떠 지어졌다. 2012년 개관한 이 건물은 청운동에 버려진 물탱크와 수도가압장 시설을 재건축해 문학관으로 재탄생했다. 뛰어난 공간 연출로 건축상도 여럿 받았다. 2013년 1월에는 한국문화공간건축학회에서 주관하는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을, 2014년에는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기도 햇다.

그만큼 독특하다. '시인채'로 불리는 1전시실은 여느 문학관, 전시장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2전시실 '열린 우물'과 3전시실 '닫힌 우물'은 쓸쓸하고 서늘했던 그의 삶을 투영시킨다. 1전시관의 두꺼운 문을 열고 나선 뒤 만나는 2전시실은 사실 전시실이라기보다는 작은 마당이다. 직사각형의 닫힌 공간 속에 아무것도 없다. 위가 뚫려 있어 하늘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원래 물탱크였던 터라, 저장됐던 물의 흔적이 벽체에 그대로 남아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느끼게 한다.

윤동주의 시와 인생을 겉핥기로 스쳐 지나온 관람객은 마침내 이곳에서 그의 시 속에서 되뇌었던 '부끄럽지 않게 우러를 수 있는' 하늘과 볼을 스치는 파아란 바람을 만난다. 미세먼지의 연속이던 이번 겨울의 나날 중 유난히 맑은 날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그것은 특이한 경험이다. 시인이 활자로 남긴 시, 그 속의 영감을 눈과 코와 손끝으로 만나본다는 것은.

'닫힌 우물'인 3전시실로 가면 느낌의 채도가 달라진다. 물탱크를 재활용한 이곳은 사방이 어두운 닫힌 공간이다. 침묵하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이 공간은 빛 줄기가 단 하나만 스며들게 지어졌다.

별 헤는 밤, 서시, 쉽게 쓰여진 시. 그의 대표시와 함께 보여주는 시인의 짧은 생애는 '비애'라는 한마디 외는 할 말이 없다. 10여분 동안 시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영상실로 이용되는 이곳에서 관람객은 깊은 우물 속, 시인이 갇혀 마지막을 맞았던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 어쩌면 죽어서 묻힌 차가운 땅 속을 느낀다.

이곳에서 만난 40대 중반의 관람객 정국주씨(46)도 그래선지 "3전시관까지 둘러보니 마음이 먹먹하다"고 했다. 그는 울산에서 가족과 서울 나들이를 온 관광객이었다. 중학생인 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온 정씨는 이곳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스물여덟 해, 짧은 생애에서 서울은 그가 잠시 머물렀던 곳에 불과했다. 그가 태어난 곳도, 죽은 곳도, 묻힌 곳도 이곳이 아니다. 스물이 넘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이 본격적인 서울살이였다. 그는 정병욱과 함께 서울 누상동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며 시 집필에 전념했지만, 25세인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듬해인 26세에 학업 도중 귀향하려 했지만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돼 차가운 형무소에서 비참하게 요절하기까지 한국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결국 서울에 남은 그의 흔적은 그의 짧은 생(生)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가 머물렀던 하숙집도 원형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그 터도 현재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면서 하숙집 터를 알리는 명판만 붙어 있다.

조윤주 기자 사진=박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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