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재벌과 딜을 하자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2.06 17:00

수정 2017.02.06 17:00

무작정 때리는 건 어리석어
경영권 승계 길 터주는 대신 투자·일자리 약속 받아야
[곽인찬 칼럼] 재벌과 딜을 하자

재벌이 동네북 신세다. 최순실 사태의 불똥이 세게 튀었다. 예전에도 선거철만 되면 재벌은 도마에 올랐다. 올해는 개혁 바람이 더 세게 불 것 같다. 아예 재벌을 해체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재벌은 과연 천하의 악당인가.

미움을 살 법도 하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매출 202조원에 29조원을 벌었다. 주가는 200만원을 오르내린다. 임직원들이 설 명절을 앞두고 두둑한 보너스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많게는 연봉의 절반을 성과급으로 가져갔단다. 주주들도 신이 났다. 주가가 쑥쑥 오른 덕이다. 현대차도 작년에 영업이익으로 5조원 넘게 남겼다. 조 단위 이익을 올린 대기업은 수두룩하다.

가만 보고 있자니 공연히 심통이 난다. 여기저기서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들린다. 나라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하지만 대기업은 딴 세상 같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자영업자, 비정규직, 청년실업자들의 눈에 기업 실적은 그들만의 잔치다. 이웃이 땅 사는 걸 우두커니 지켜보자니 배가 아파 미칠 지경이다.

견디기 힘든 상대적 빈곤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정치인들은 재벌을 뜯어고치자고 말한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재벌적폐 청산이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이 시대 최고권력인 재벌체제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 진영의 유승민 의원, 남경필 경기지사도 재벌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대권주자들의 대의에 동감한다. 재벌을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시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의 고른 분배는 분명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다.

문제는 '어떻게'다. 재벌을 어떻게 뜯어고치는 게 최선일까. '닥치고 응징'이 능사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정치인에겐 '정의의 사도' 콤플렉스가 있다. 그래서 인정사정없이 재벌을 혼쭐내는 모습만 연출하려 든다. 표를 의식해서다. 이래선 재벌을 이길 수 없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문다. 하물며 재벌은 쥐가 아니라 호랑이다. 잘못 건드리면 잡아먹히기 십상이다. 아니꼽더라도 살살 달래야 한다.

몇 가지 현실적인 방안이 나와 있다. 신장섭 교수(싱가포르국립대)는 공익재단 설립을 통한 경영권 승계를 제안한다('경제민주화…일그러진 시대의 화두'). 이는 "65%의 상속세를 다 내면서 경영권을 승계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상속세는 한번 걷으면 끝이다. 반면 재단을 세우면 꾸준히 공익에 돈을 쓸 수 있다. 미국엔 록펠러.포드.게이츠 가문, 스웨덴엔 발렌바리 가문이 있다. 우리도 이병철.정주영재단을 가질 때가 됐다. 그 대신 공익재단을 세우면 상속세는 왕창 깎아주자.

김영욱 금융연구원 초빙연구원은 중앙일보 칼럼에서 양극화 개선과 일자리 창출을 경영권 승계와 맞교환할 것을 제안한다('이 질긴 정경유착 고리를 끊으려면'). 승계 문제를 과감하게 풀어주되 재벌로부터 반대급부를 얻어내자는 얘기다.

밉든 곱든 재벌은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운 일등공신이다. 부수면 우리만 손해다.
중국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으로 경제를 일으켰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재벌개혁도 실용적으로 접근할 순 없을까. 투명하게, 공개적으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자. 우리 속담에도 꿩 잡는 게 매라고 하지 않나. 적어도 표(票)바라기 정치인의 대형 자해(自害)만은 없길 바란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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