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차장칼럼] 증시에 열린 '한진해운 도박판'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2.23 17:09

수정 2017.02.23 17:09

[차장칼럼] 증시에 열린 '한진해운 도박판'

한참 전 얘기다. 정선에 들어선 내국인 전용 카지노 '강원랜드'가 화제가 되고 있을 무렵이다. 호기심에 친구들과 그곳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까지 내가 상상했던 카지노는 영화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습이었다. 멋들어진 슈트를 차려 입은 제임스 본드가 폼나게 칩을 베팅하며 우아하게 돈을 따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런데 강원랜드는 내 기대와 좀 달랐다.
토요일 오전 느지막히 들어가본 카지노 안은 이미 북새통이었다. 게임이 벌어지는 테이블마다 몇 겹을 둘러싼 사람들 때문에 딜러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앞사람의 어깨 위로 베팅칩을 던지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OO산업' 'OO철강' 등 회사이름이 쓰여 있는 작업복 차람의 남성들부터 운동복 차림의 젊은 청년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이 뒤섞여 있었다. 결과가 나올 때마다 누구는 머리를 쥐어뜯고 다른 누군가는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엇갈렸다.

이 생경하고도 기괴한 에너지가 넘치는 분위기에 우리 일행은 주눅이 들고 말았다.

23일 코스피에서 한진해운의 정리매매가 시작됐다. 대형 포털사이트에서 '한진해운'을 검색해보면 종목정보와 함께 투자자들이 의견을 나누는 '종목토론실'에 들어갈 수 있다. 그중 한 글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인생 역전은 한진 카지노에서'.

그렇다. 이게 바로 상장폐지종목에서 벌어지는 '폭탄돌리기'를 말하는 것이다. 게시판에는 진짜 투자자인지 그냥 심심풀이로 찾아오는 네티즌인지 모르겠지만, 수백 건의 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데 제목들이 가히 볼만하다.

얼마를 '몰빵' 했다는 자랑부터, 언제쯤 첫 부고장이 붙을 것이라는 섬�한 예언에, 어디쯤이 바닥이니 실탄을 준비하라는 예고까지 글만 읽었는데도 모니터에서 열기가 느껴질 정도다. 정선 카지노에서 느꼈던 그 괴상한 에너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폭탄돌리기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난다. 누군가는 물량을 떠안은 채 끝이 날 것이고, 그건 그냥 휴지조각이 된다. 상장폐지종목이 나올 때마다 이런 아수라장이 반복된다.

새해에 증시전문가들이 내놓는 전망에는 항상 '한국 증시는 저평가되어 있다'는 말이 들어간다. 충분히 좋은 시장인데 외부에서 값을 낮게 쳐준다는 얘기다. 남 탓할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을 했다. 증시도 똑같다.
투자자들의 성숙도가 시장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증권부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