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트럼프의 립서비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의 충격파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 타격을 받은 부류는 이민자 계층이다. 이민자에 대한 주류사회의 시선은 차가워지고 있고, 불법체류자들은 이민국 단속요원이 두려워 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남미계 이민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뉴욕시 일원의 빨래방부터 잡화점에 이르기까지 이민자들이 많이 찾는 소매업소들은 갑자기 손님이 줄어드는 바람에 매상이 절반가량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미국 대도시에서 소매업에 종사하는 한인들도 걱정이 태산이다. 매상 감소로 경제사정이 악화됐지만 일손이 줄어드는 것은 더 큰 걱정거리로 부각되고 있다. 미주 한인업체들이 남미계 노동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네일아트 등 미용, 요식, 봉제, 식품, 잡화 업종은 남미계 이민자 없이는 운영이 안 될 정도로 이들의 구매력과 노동력이 중요하다.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뉴욕 플러싱의 한 한인식당 업주는 "최저임금을 받고 주방에서 힘든 일을 하려는 한인을 찾기 어렵다 보니 대부분의 한인 식당은 남미계 서류 미비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면서 "한인 없이 한식당을 운영할 수는 있어도 남미계 종업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트럼프에 대한 평가는 결코 좋을 수가 없다. 주류사회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를 뼛속까지 좋아하는 골수 지지자도 많지만 대다수 국민은 트럼프를 좋지 않게 평가하고 있다. 최근 미국 NBC 방송과 월스트리트저널(WSJ)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의 업무 지지율이 44%, 반대율이 48%를 기록해 관련 조사가 이뤄진 이후 역대 대통령의 임기 초 지지율로는 최저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 지지율이 반대율보다 34%포인트나 높았으며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지지율이 45%포인트나 높았다. 트럼프가 "예상보다 잘하고 있다"는 대답은 19%에 불과했다.

저조한 지지율을 의식한 조치였을까. 트럼프가 지난달 28일 취임 후 가진 첫 합동 의회 연설은 인상적이었다. 약 1시간 동안 행한 연설에서 트럼프는 국민의 화합과 경제성장 및 인프라 투자의 중요성, 세제개혁, 건강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 폐기,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계획 등 다양한 이슈를 언급했다.

트럼프의 이날 연설에서는 대선 후보였을 당시 보여준 비관적이고 비꼬는 논조가 아니라 낙관적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이날 연설을 지켜본 상당수 언론과 전문인 그리고 국민은 어조만 달랐지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었다고 평가했다.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않고 그동안 자신이 주장해온 이슈들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의 미사여구는 새롭고 높은 차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말한 목표들은 화해나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익숙하면서도 분열을 초래하는 것들"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추락한 지지율은 이날 연설을 계기로 반등할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그의 연설이 미국 국민들 입장에서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닐슨에 따르면 이날 연설을 TV로 지켜본 미국 시청자는 무려 4300만명에 달했다.

트럼프는 대선 당시 자신이 기존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강조하는 차별화 전략을 밀어붙여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막말 수준의 거친 발언도 미국 보수층을 끌어모으는 계기가 됐다. 다만 이번 의회 연설로 그다운 솔직함을 찾아보기는 어려워졌다. 추락하는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립서비스'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라고 자부한 트럼프지만 워싱턴 입성 40일 만에 기성정치인이 돼버렸다.

jjung72@fnnews.com 정지원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