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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대선 민심, 현장을 가다] 길 잃은 TK민심 "정치 얘기 마소".. 누구에게도 마음주지 않았다

이태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3.20 17:59

수정 2017.03.20 21:55

1.‘보수의 심장’ 대구
상처 입은 ‘朴의 정치적 고향’
대구 출신 후보 유승민에겐.. "존재감 없다" 딱 잘라 말해
젊은층에선 확실한 변화 "정치인은 사람 보고 뽑을 것"
고령층은 ‘미워도 보수’"문재인, 대통령 되는 꼴 못봐"
[출렁이는 대선 민심, 현장을 가다] 길 잃은 TK민심 "정치 얘기 마소".. 누구에게도 마음주지 않았다

[출렁이는 대선 민심, 현장을 가다] 길 잃은 TK민심 "정치 얘기 마소".. 누구에게도 마음주지 않았다

[출렁이는 대선 민심, 현장을 가다] 길 잃은 TK민심 "정치 얘기 마소".. 누구에게도 마음주지 않았다

【 대구=이태희 기자】 화재로 임시 휴장에 들어갔던 대구 서문시장 야시장이 재개장했다. 지난 17일 찾아간 서문시장은 완벽히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사고 110여일 만이다. 손님들이 시장을 가득 메운 탓에 똑바로 걷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사고 후유증을 완벽히 씻어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으로 인한 충격은 시장 안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시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묻자 순식간에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런 거 묻지 마소. 생각하기도 싫으니." 시장을 찾은 한 30대 남성이 답했다. 왜 그러냐고 재차 묻자 그는 "너무 많이 실망해서"라는 답변만 남기고 돌아섰다.

■방향 잃은 대구 민심…"누구를 뽑나"

박 전 대통령을 향한 탄식은 서문시장 이곳저곳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직업을 밝히지 않은 조모씨(45)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써가며 정치에 신물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조씨는 "정치인들은 다 도둑놈들에다 불량한 놈들"이라며 "박근혜 대통령도 그러는 꼴을 보고 이제는 아예 뉴스를 안보고 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정치를 바꿔보고자 하는 마음은 남아 있었다. "그럼 대선 투표를 하지 않으실 생각"이냐고 묻자 "하긴 해야지"라고 답했다. 누구를 뽑아야 할지는 고민이 깊은지 쉽사리 대답을 잇지 못했다.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어떤 후보를 뽑겠다'고 명확하게 답할 수 있었던 시민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11년째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고 밝힌 50대 전집 주인 최모씨는 "보수라고 다 뽑아주지는 않을거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진짜 먹고사는 문제 좀 잘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없겠나"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젊은 층의 목소리를 더 들어보기 위해 다음날 동성로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대구에서 태어난 토박이라고 밝힌 택시기사 유제준씨(62)는 자신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대구시민들의 입장을 말해주겠다고 자신있게 밝혔다. 그는 "대구에서 아직도 박근혜 대통령 편을 드는 줄로 알지만 극히 일부다"라며 "민주당이 집권해도 과격 단체들만 반발하지 다 먹고살기 바빠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씨는 서울에서처럼 대구에서도 태극기집회, 촛불집회가 갈라져 거리를 막고 시위를 했다고 설명하면서 동성로 거리를 손으로 가르듯 가리켰다. 그는 이어 "보수성향 시민들이 믿고 뽑을 만한 인물이 없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유승민 의원 등 자유한국당을 탈당한 바른정당이 대안이 될 수 없겠느냐고 묻자 "존재감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또 "일부 나이 많은 사람들은 바른정당을 '배신자'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20~30대 젊은 층도 이번 대선에서 어떤 후보를 뽑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구 문화의 중심이자 젊음의 거리인 동성로는 따뜻해진 날씨에 몰려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들 역시 정치 이야기를 슬쩍 꺼내자 곧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동성로 거리에서 만난 대학생 임성빈씨(25)는 "투표를 해봐야 결과가 산으로 가더라"며 자조 섞인 웃음을 보였다. 그는 주변에 투표 안하겠다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고 전했다. 임씨는 "정치는 사람을 보고 뽑아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본인은 지지하는 후보를 이미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후보인지 밝히고 싶지 않다"며 "자유한국당은 아니다"라고 슬며시 덧붙였다.

'반드시 보수후보를 뽑겠다'고 나서는 지지자는 다시 서문시장으로 돌아와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이날 서문시장은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출마선언식 준비로 분주했다. 시장에서 마주친 70대 남성에게 홍 지사에 대해 물었더니 그를 잘 모르는 눈치였다. '보수진영의 유력 대선주자'라고 귀띔해주니 "그럼 지지해줘야지"라고 답을 해왔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볼 수는 없다"고 이유를 덧붙였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심경을 묻자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며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늘 마음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서문시장에서 진행한 홍 지사의 대선출마 선언식에는 1만여명의 사람들이 몰렸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홍 지사를 열렬히 지지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행사장을 둘러싼 이들에게 이야기를 건넬 때마다 모두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보수, '희망'은 있지만 '압도적 지지'는 없다

5월 9일 19대 대선을 향한 대구의 민심은 가늠하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대구는 최근에 치러진 몇 차례의 대선에서 이회창.이명박.박근혜 후보에게 70~80% 이상의 표를 몰아주며 보수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보수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구 민심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서문시장도 더 이상 보수층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시장 상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시장 민심이 절반 대 절반 정도로 나뉘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남아 있어 지지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면서도 "일부 상인들은 서문시장에 때가 되면 찾아오는 보수진영 정치인들을 매우 짜증 나게 바라보기도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대구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들도 민심의 흐름 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대구지역 각계인사 1000여명이 모인 '새로운 대구를 열자는 사람들'은 지난해 12월 '대구가 쓰는 반성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난국에 솔직히 대구 사람들이 할 말이 없다. 국민들과 역사 앞에 오로지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다"며 "우리 대구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대구 시민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대변했다.

경북대 하세헌 교수는 "식자층들이 이런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대구.경북(TK)의 민심의 흐름은 '암중모색' 단계로 보면 된다"고 정의했다. 하 교수는 "앞으로 자유한국당 쪽으로 자연스럽게 표가 몰리겠지만, 이회창.이명박.박근혜 후보 때처럼 압도적인 지지는 누가 후보로 나오든 절대 얻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지난 총선에서 진보성향의 의원들이 당선되고 있는 것을 보면, 대구는 분명 바뀌고 있다"며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그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업체 관계자는 "시간이 지나면 TK 지역의 보수후보 지지율이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민주당 후보들이 현재 선전하고는 있지만 당내 경선이 마무리되고 후보가 정해지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며 "TK 민심이 문재인 후보에게까지 향할 것이냐는 쉽지 않은 문제다"라고 조언했다.
이어 "자유한국당에서 확실한 후보를 정하고 이름을 알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지지율이 오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대결구도가 확실해지면 상황이 많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golee@fnnews.com 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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