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영 칼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작동하는가

지령 5000호 이벤트

다음 대통령이 안녕하려면 정당이 갈등조정 주역 돼야
후보 사조직 살찌는 현상 불길

카를 마르크스가 그랬던가.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 끝난다"고. 하지만 21일 부은 얼굴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보면서 이 비유가 적확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하의 흉탄에 숨진 데 이어 그 딸마저 현직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게 희극일 리야 없다.

대한민국호(號)의 선장이 다수 승객의 요구로 물러났지만 그 과정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잘 작동한 것인가. 이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때만 이번 탄핵은 민주화의 진일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촛불 명예혁명'이라며 축배를 들기엔 아직 이를 듯싶다. 탄핵을 반대하며 태극기를 든 이들의 불만이 잔불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다. 이들에게 반발의 빌미를 준 검찰.특검의 고영태 일당 수사 포기나 여성 대통령에 대한 관음증적 공세 등은 부차적 문제일 수 있다. 최순실 국정 사유화 논란이 국가 운영체제가 정상 작동하지 못한 방증인데도 그 시스템은 고장난 그대로가 아닌가.

그렇다면 대한민국호의 다음 선장은 안녕할 수 있을까. 이를 낙관할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권위주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1987년 헌법 개정 이후에도 우리 대통령들의 비극은 이어졌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 말고도 역대 대통령들의 추락을 신물 나게 보아 왔지 않나. 비선 측근에 의한 국정 난맥이나 아들과 부인, 친형 등 직계 가족들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은 국민의 눈엔 5년 주기의 데자뷔 현상이었다.

사실 대통령 파면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선진국에선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런 불행한 사태가 차기나 차차기 정부에서 재연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요행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법치'보다 '인치'가 뿌리내린 토양이 바뀌지 않으면 정치불안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승리에 눈이 먼 대선주자들이야 남의 일로 여기겠지만….

탄핵 이후 한국 정치를 걱정하던 차에 원로급 학자인 최장집 교수의 책을 펴들었다. 그의 지론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 2005년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지금 읽어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 많다. 특히 "대통령이 정당의 수장으로서 정당을 사유물처럼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권위주의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정당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따지고 보면 최순실 국정 농단도 집권당이 제구실을 못해 빚어진 일이 아닌가. '정책의 산실' 역할은커녕 '진박 놀이'나 벌이는 통에 말이다. 당론을 거슬러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내는 여야 후보들이 그래서 걱정스럽다. 당은 겉돌고 후보 사조직만 살찌는 현상은 더 불길하다. 특히 여론조사에서 대세라는 문재인 후보 캠프를 보면 그렇다. 몰려든 교수만 1000명 선이라니 큰 대학을 만들 정도다. 이들이 "선거 후 다 한 자리씩 달라고 할 것"이라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비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5월 '장미 대선'을 앞둔 지금 대한민국호는 격랑의 바다에 떠 있다. 경제는 성장 둔화와 내수 침체라는 암초를 만났고 중국의 사드 보복에다 미국발 보호무역주의의 파도는 밀려오고 있다.
공동체가 정당이란 평형수를 채우지 못해 침몰해선 안 될 말이다. 정당들이 '제왕적 대통령(야당은 당수)'의 들러리가 아니라 사회 전 부문의 갈등을 수렴하는 주역이어야 한다. 여야가 목전의 대선에만 목을 맬 게 아니라 분권형 개헌에 합의해 나가야 할 이유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