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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 베란다 야생화

차석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3.27 17:12

수정 2017.03.27 20:13

[윤중로] 베란다 야생화

고맙게도 집사람은 딸 아들 각각 한 명씩 낳아주고 30년 가까이 살아주고 있다. 그런 와이프지만 나도 불만은 있다. 그중 하나가 한겨울에도 안방 베란다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자는 것이다. 우리집은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잘 틀지 않는다. 난방비를 아낀다는 측면도 있지만 굳이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도 아래 위 옆집에서 트는 보일러 덕분에 20도 정도를 유지한다. 그래서 그런지 애들도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다.
사실 한겨울 실내온도 20도는 썰렁하다. 가끔 지인들이 오면 "이 집은 왜 이렇게 추워"라며 비난을 쏟아낸다. 추운 집인데 거기다가 잠잘 때도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으니 나는 불만이다. 하지만 한번도 창문을 닫은 적이 없다. 이유는 애지중지하는 꽃들 때문이다. 겨우내 춥게 살아야 봄에 꽃을 잘피운다고.

한 10년 전인가 집사람은 갑자기 집 근처 화원을 뻔질나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1년 내내 모습이 변하지 않는 선인장이나 벵갈고무나무 같은 관엽수 몇 그루 정도 있었는데, 작은 풀때기(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들이 담긴 화분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퇴근해보면 하루에 적어도 한두 개씩은 늘어났다.

처음에는 그저 잡풀 같은 모습이라 "그런 거를 뭐하러 사느냐"고 물었다. 쓸데없는 데 돈 쓰냐는 불만을 감춘 채. "조금만 기다리면 당신 눈이 세상에서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야."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가니 옷도 벗기 전에 베란다로 와보라고 한다. 야생화들이 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이쁘게 피었네"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수십종의 야생화가 꽃을 피우니 베란다는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 말로는, 글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마치 왕에게 간택을 기다리는 궁녀들처럼. 야생화들은 색깔이나 구조가 과연 인간이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기기묘묘하고 아름다웠다.

흔히 볼 수 있는 패랭이꽃부터 바람꽃, 꿩의다리, 골무꽃, 향이 좋은 남산제비꽃, 노루귀 등 이름도 재미있는 야생화들이 내 눈을 홀리고 코를 벌렁거리게 했다.

집사람은 "이 맛에 야생화 키우는 것이야"라 한다. 여름에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물을 주느라 어디 놀러도 잘 못간다. 정말 공이 많이 들어간다. 딸 키우는 것 못지않은 일이다.

집사람이 단골로 가는 꽃가게 주인은 중학생 손주가 있는 할머니시다. 그분도 처음에는 야생화가 좋아서 집에 하나둘씩 키우다 보니 너무 많아졌고, 그것이 아예 직업이 되어버렸다.
집사람은 이제는 손님과 주인이 아니고 친정 언니 같은 사이가 됐다. 그런데 지난 주말 화원을 다녀오더니 "예전 같으면 화원에 손님들로 북적거려야 할 때인데, 몇시간 동안 한 명도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춘래불사춘. 집사람은 야생화들이 꽃이 피기를 학수고대하며 물을 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봄도 얼른 와라. cha1046@fnnews.com 차석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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