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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국가를 다시 세우자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4.03 17:14

수정 2017.04.03 17:14

[fn논단] 국가를 다시 세우자

"실로 나라와 세상을 건질 만한 위대한 저작이다." 1770년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 서문에 경상도 관찰사 이미는 이렇게 썼다. 원고의 완성에서 출간까지는 1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나마 탕평의 군주 영조였기에 가능했지, 조선시대 실학자의 책은 당대 거의 출간되지 못했다.

영조 17년 대통령 수석비서관 격인 승지 양득중은 영조에게 아뢰었다. "근세에 호남 유생 유형원이란 사람이 쓴 책이 '반계수록'입니다.
신은 일찍이 스승 윤증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데, 옛 성왕의 정치를 시행하고자 한다면 꼭 갖추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영조는 책을 즉시 구해 올리라고 명을 내렸다. 영조 26년에는 좌참찬 권적이 상소를 올렸다. "수록의 개혁안이야말로 곧 3대 이후 제일가는 국가 경영의 위대한 계획"이라며 간행을 청했다. 양득중이 거론하고 약 30년이 흐른 후인 영조 46년 왕명을 내려 '반계수록'을 경상도 관찰사영에서 목판본으로 출판토록 했다. 유형원이 죽은 직후인 숙종 때에도 몇몇 선비가 국정개혁에 이 책을 참고하라고 국왕에게 청했으나 조정 대신들은 '되지도 않은 일'이라고 묵살해 버렸다.

유형원이 활동하던 17세기 조선의 최대 과제는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연이은 외세의 침략에 국가는 무기력하게 무너졌고 조선 사회의 각종 폐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가장 큰 문제가 조세와 병역 등 국가를 받쳐주는 중간층인 양인계층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생산기반인 토지는 양반 지주층에 집중되고 국역이 면제되는 노비층이 전 인구의 3분의 1로 늘어났다. 그럼에도 조정은 눈앞의 이해다툼으로 당파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유형원은 1622년 서울의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여느 양반 자제와는 달리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만 권의 책을 가지고 전북 부안에 내려가 반계서당을 짓고 일생을 초야에 묻혀 지냈다. 틈나는 대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그는 백성들의 피해가 끝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유형원은 모든 백성에게 '살아갈 수 있는 방편(恒産)'을 마련해 주는 일이 개혁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최소한의 토지배분이라고 보았다. 그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기본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세제, 교육, 과거제, 정부, 국방, 노비제 등 일련의 개혁안을 완성해 나갔다.

개혁에 대한 방법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진지한 논의조차 없어 보인다. 1741년 양득중은 영조에게 임금과 신하가 공부하는 경연에서 '주자어류' 대신에 '반계수록'을 토론에 부쳐보자고 청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반계수록'은 100년 후 겨우 출판은 되었지만 나라를 다시 세울 개혁방안은 100년이 가도 200년이 가도 결국 채택되지 않는다. 기득권자의 이해관계로 조선은 문제의 근본은 손대지 못하고 균역법 도입 등 일부 개혁에 그쳤다.
단지 그의 담론은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져 조선 실학의 커다란 산맥을 형성했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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