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국민연금은 2중대가 아니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4.03 17:14

수정 2017.04.03 17:14

옛날식 관치 구조조정 안 통해
시장에 좀비기업 정리 맡기고 정부는 시스템 위기만 챙겨야
[곽인찬 칼럼] 국민연금은 2중대가 아니다

대우조선해양 명줄을 국민연금이 쥐고 있다. 놀라운 변화다. 종래 국민연금은 정부 2중대쯤으로 여겨졌다. 거꾸로 지금은 상전이다. 정부가 감히 말도 못 붙인다. 금융위원회 임종룡 위원장은 기금운용본부 입만 쳐다보고 있다.
특검 1호로 구속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보라. 압력을 넣었다간 요절이 날 판이다. 최순실 학습효과다. 국민연금은 대우조선 회사채 3900억원어치(29%)를 갖고 있다. 정부가 요청한 대로 50%를 출자전환하고 50%를 만기연장하는 데 도장을 찍으면 손해가 따른다. 기금운용본부가 뻗대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시중은행들도 달라졌다. 굳짜 취급에 신경질 섞인 반응을 보인다. 대우조선 회사채를 주식으로 바꾸라고? 누구 맘대로 출자전환? 대우조선이 살아날지 못 살아날지는 조물주만이 안다. 상대가 정부라 말을 골라서 할 뿐이지 속은 뒤집힌다.

속이 더 쓰린 건 국책은행이다. 1조6000억원을 전액 출자전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국책' 간판 때문에 대놓고 투덜대지도 못한다. 그나마 노조원들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산은 노조는 "산은은 무능한 정부의 방패막이"라고 자탄했다. "산은이 정책금융기관인지 정부가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자동입출금기(ATM)에 불과한지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산은마저 슬슬 반란을 꿈꾼다.

대우조선은 구조조정 실패작이다. 처음엔 대마불사(大馬不死)였다. 종업원만 수만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패불사(大敗不死)가 됐다. 하도 망가져서 손을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너지면 산은.수출입은행도 성치 못하다. 물귀신이 따로 없다.

나는 임종룡 위원장이 내린 추가 지원 결정을 이해한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대우조선을 내팽개칠 순 없다. 도박에도 마지막 한판이 있다. 이때 꼬불친 돈까지 죄다 털어넣는다. 지금 임 위원장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임종룡에겐 구조조정 '칼잡이'란 별칭이 있다. 외환위기 때부터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최일선에서 뛰었다. 하지만 대우조선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돼야 한다. 뻗대는 국민연금, 볼멘 시중은행, 궁시렁대는 국책은행을 보라. 정부 주도형 부실기업 정리는 시대착오적이다.

미국도 급하면 정부와 중앙은행이 나서지 않느냐고? 맞다. 금융위기 땐 의회까지 나섰다. 하지만 경제 뿌리가 흔들릴까봐 그랬다. 시스템 리스크가 닥치면 어느 나라든 국가가 팔을 걷고 나선다. 안 그러면 직무유기다. 외환위기 때 한국 정부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럼 한진해운 파산은 시스템 리스크일까. 턱도 없다. 증시를 보면 안다. 주가는 끄덕도 안 했다. 대우조선 파산은 시스템 리스크를 부를까. 무슨, 시장은 불확실성이 사라졌다며 되레 반기지 않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 선고를 받은 날 코스피.코스닥 모두 올랐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파면 결정은 국가 신용등급에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모르는 새 한국 증시, 나아가 경제는 이렇게 단단해졌다. 부실기업 하나 사라진다고 뿌리가 흔들릴 약골이 아니다.

결론은 이렇다. 시스템 리스크가 아닌 한 정부는 손을 떼라. 부실기업 처리는 시장에 맡겨라. 시장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정부는 시장에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탄핵 촛불집회에선 경찰과 시위대가 한번도 충돌하지 않았다.
왜일까. 청와대 간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문가한테 맡기면 알아서 다 한다.
은행, 투자은행, 사모펀드가 구조조정 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줘라. 정부 주도형 구조조정은 대우조선이 끝이 돼야 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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