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로]

오이와 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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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기사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오싫모)'에 관한 것들이었다. 오싫모라는 페이스북 모임에 10만명 가까운 회원이 순식간에 모였다는 것인데, 예상 밖의 뜨거운 호응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란 듯하다.

오싫모 뉴스를 접하면서 나는 뜬금없이 (오이가 아니라) 토란을 떠올렸다. 오싫모 회원들이 오이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만큼 나는 토란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지금은 토란을 오물오물 씹어 삼킬 수 있는 인내력을 키웠지만, 어린 시절 토란국을 먹을 때의 그 끔찍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추석날 아침 차례를 지내기 위해 큰집에 가면 토란국이 밥상에 올라왔다. 토란은 특유의 미끈거리는 성분이 기름진 명절 음식을 중화시키는 효과가 있어 조상들의 지혜를 칭송할 때 곧잘 등장하곤 하던 음식이다. 그러나 물컹물컹한 그 무미(無味)의 덩어리를 목구멍으로 넘긴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고통이었다.

어린 시절 음식을 남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명절 땐 집안 어른들과 겸상을 했는데, 밥상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반찬을 남길 순 있었지만, 자신에게 할당된 밥과 국은 싹싹 비워야 했다. 부엌에 있는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위해 토란의 양을 줄인다 해도 국그릇에 토란 몇 알은 들어가게 마련이어서 그 엄중한 자리를 벗어나려면 토란을 꿀꺽 삼키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에게는 토란이 오이였던 셈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10대 후반의 우리집 아이도 오이를 싫어한다. 오이 외에도 토마토와 깻잎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왜 그것들이 싫으냐고 물어보면 향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향기로운 오이와 깻잎의 냄새가 아들에게는 역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오이와 깻잎은 그렇다치고, 향이 없는 토마토는 왜 싫을까. 내가 묻자 아들은 유치원 시절의 일화를 들려줬다. 점심시간이면 배식판에 밥을 줬는데, 후식으로 꼭 방울토마토가 한알씩 올라왔다고 한다. 선생님들에게 방울토마토는 식사예절 교육의 마침표와 같은 것이어서 토마토까지 다 먹어야 점심시간을 끝낼 수 있었다고 했다. 하루는 토마토가 먹기 싫어서 그걸 책상 아래 숨겼다. 그런데 그 사실이 들통나서 된통 혼이 나고 토마토도 강제로 먹게 됐다고 한다. 그 뒤로는 내가 토란을 꿀꺽 삼켰던 것처럼 아들도 토마토를 꿀꺽 삼키는 방법으로 그 공포스러운 국면을 모면했던 모양이다.


이번 오싫모 뉴스와 관련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타인의 취향이 존중되는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취향이 소중하듯이 그의 혹은 너의 취향이 소중하고, 심지어는 내가 틀리고 네가 옳을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 말이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