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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칼럼] 진실을 말해도 죄가 되는 세상

조상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5.21 17:04

수정 2017.05.21 17:04

[차장칼럼] 진실을 말해도 죄가 되는 세상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사유 중 언론의 자유 침해부분은 헌법재판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함께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를 바꾼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 대표적인 게 허위사실이 아닌 사실, 즉 진실을 적시한 데 따른 명예훼손죄다. '사실을 말한 것은 죄가 안 된다'는 상식은 법전을 펼치는 순간 뒤죽박죽이 돼 버린다.

현행 형법은 사자(死者) 명예훼손과 달리 허위사실은 물론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한 경우도 명예훼손죄를 적용,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 역시 사실을 드러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다.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고 인정될 때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면책조항이 있지만 이런 판단 역시 법원의 영역이어서 표현 및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한국은 지난해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180개 조사대상 국가 중 70위를 기록, 전년보다 10단계나 떨어지며 역대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국가의 위상을 감안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다.

형사상 명예훼손 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폐지 과정을 밟고 있다. 1992년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2001년 아프리카 가나, 2002년 스리랑카, 2007년 멕시코가 명예훼손 제도를 없앴다. 유럽의 경우 2004년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에스토니아, 조지아, 우크라이나, 몰도바가 명예훼손 형사처벌 제도를 폐지했고 프랑스,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는 징역 등 자유형을 없앴다. 선진국 중 형사상 명예훼손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독일, 독일 형법을 이어받은 일본이 대표적이다. 다만 독일은 명예훼손으로 투옥된 사람이 거의 없고, 유죄 대부분이 벌금형에 그치고 있다. 미국은 15개주가 명예훼손죄에 따른 형사처벌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들 주에서 제기되는 사건은 연간 2~3건에 불과할 정도로 사실상 사문화됐다.

반면 검찰의 기소로 한국법원에 접수된 명예훼손 사건은 2011년 2881건에서 2015년 3948건으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이 가운데 1심에서 집행유예가 아닌 실형(유기징역)이 선고된 것은 2011년 43건에서 2015년 90건으로 4년 사이 2배 가까이 늘었다.
허위사실에 근거한 악의적 보도는 손해배상 등 법적 책임을 져야 하지만 진실 보도에 대해서까지 국가가 형벌권을 이용해 처벌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완전 폐지가 어렵다면 적어도 공인이나 권력기관을 상대로 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손볼 때가 됐다.
진실한 사실의 표현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의견 형성의 기초이자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 기능을 수행하는 핵심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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