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재훈 칼럼] 기운 운동장, 최저임금위

이재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6.19 17:05

수정 2017.06.19 17:05

‘2020년에 1만원’ 정부 지침에 위원회는 거수기로 전락할 판
노.사.공익 3자 구조 존중해야
[이재훈 칼럼] 기운 운동장, 최저임금위

지난해 7월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를 탈퇴했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지난 15일 기세등등하게 복귀했다. 복귀 결정 전날인 지난 13일 민노총은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들이닥쳐 "노동적폐의 본산인 경총은 스스로 해체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년도 최저임금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일 경총에 대해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노동계는 기자회견에서 "적폐정권이 물러가고 최저임금 1만원을 약속한 정부가 출범했다"고 복귀 배경을 설명했다.

노동계는 당장 내년에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자며 장외투쟁을 병행하고 있다.
민노총은 오는 30일 이른바 '사회적 총파업'까지 예고했다. 하지만 이는 협상 당사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반대로 협상 상대방인 경총, 중소기업중앙회 등은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 경총은 문재인정부의 일자리정책에 토를 달았다가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호통에 혼비백산했다. 중소기업들은 국정기획위 간담회에서 최저임금 인상에 속도조절을 주문했다가 "경총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며 핀잔을 들었다.

정부가 심의를 요청한 지 77일 만에 가동된 지난 15일의 최임위에서도 노사 간의 상반된 분위기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특히 공익.사용자위원 사이에서는 불만의 기류가 감지됐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까지 올리겠다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최임위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얘기다. 하긴 최임위가 발족한 1987년 이후 지금까지 정부가 구체적인 수치를 못박아 인상안을 제시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정부 가이드라인대로라면 최저임금은 앞으로 3년간 매년 15.7%씩 올려야 한다. 중소.영세기업과 소상공인들이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다. 정부가 위촉하는 공익위원(9명) 중에선 "거수기 역할을 하라는 뜻"이라는 푸념이 나왔다. "이럴거면 굳이 최임위를 계속 둘 필요가 있겠나"하는 비판도 비등했다. 맞는 말이다. 최저임금은 정부가 아닌 노.사.공익위원 27명이 결정하는 것이다. 노사가 시장논리에 따라 최저임금을 정하라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걸 정부가 좌지우지한다면 위법 소지가 다분하다.

노동계는 작년 최저임금 결정에 반발하며 "최임위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비판했다. 공익위원들이 (사용자편을 드는) 정부 입장만 대변한다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국회나 노사단체 합의로 공익위원을 선출하자고 주장했다. 이제 노동계 친화적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최임위가 '거꾸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셈이다.

좀처럼 노사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는 현행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은 종전에도 많았다.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등 선진국처럼 아예 정부가 최저임금을 정하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지난해 공익위원을 자진사퇴했던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최임위가 정치투쟁의 장으로 전락했다"며 "전문가들이 노사 의견을 듣고 경제지표, 생산성 등을 고려해 합리적 최저임금 수준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저생계비와 경제지표 등을 반영해 최저임금 산정 공식을 만들자는 제안, 최저임금을 지역별.업종별로 차등 적용하자는 제안도 있다.


최저임금은 여론재판식으로 결정되면 안된다. 정부가 객관성.중립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어떤 제도를 채택하더라도 잡음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최저임금과 관련해 정부가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될 이유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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