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영 칼럼]

콜의 독일 통일 설계도

지령 5000호 이벤트

동방정책 이어받았지만 독일판 사드 논쟁 때 단호
힘 우위로 동독 변화 이끌어


독일 통일을 완성한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16일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빛바랜 취재수첩을 꺼냈다. 독일경제가 통일 후유증을 앓던 1995년 통독 현장을 찾았을 때다. 드레스덴의 옛 동독 출신 관리는 콜 총리의 인기가 시든 연유를 묻는 우문에 "아직 동독 체제하에서 살고 있다면 더 끔찍했을 것"이라고 현답을 내놨다.

사실 통독은 당시 국제정세에선 기적이었다. 옛 소련과 영국, 프랑스 등 주변 열강이 모두 반대해서다. 오죽하면 통독의 산파였던 한스 디트리히 겐셔 전 외교장관도 "비구름 뒤에 숨은 태양이 잠깐 얼굴을 내민 짧은 순간을 움켜쥔 것"이라고 했겠나. 1989년 서울에 온 빌리 브란트 전 총리조차 통독 전망을 묻자 "글쎄, 운명의 여신이 미소 짓는다면 5년 내에…. 아니면 우리 생애엔 어려울지도…"라고 말끝을 흐렸다. 첫 동서독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그도 한 해 앞을 내다보지 못한 셈이다.

물론 통독이 오롯이 콜의 업적일 순 없다. 통독은 아데나워 총리(보수)가 에르하르트(경제장관.총리)를 앞세워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서방정책의 트랙 위에서 시작된 계주였다. 에곤 바(특임장관)가 설계해 브란트(진보)가 추진한 동방정책의 바통을 이어받은 콜(보수)과 겐셔(중도)가 결승 테이프를 끊었을 뿐이다. 양독 간 국력 격차를 벌린 서방정책이나, '접근을 통한 변화'로 경제와 복지 양면에서 동독 주민들에게 서독의 우월성을 알린 동방정책 모두 통독의 밑거름이었다.

그렇다 해도 '통독 변주곡'의 최종 지휘자는 콜이었다. 그는 사민당의 양독 교류 기조를 이어받았다. 다만 동독 정권만 배불릴 대규모 경협은 자제하고 동독 주민들의 자유를 신장하는 쪽으로 발전적으로 계승했다. 1987년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과의 정상회담이 그 징표다. 한 해 200만명에 불과하던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을 675만명으로 늘리면서 콜의 기민당 정부는 큰 재정부담도 감수했다. 빈사 상태의 동독 경제로 인해 콜의 제안을 수락했던 호네커는 제 발등을 찍은 꼴이었다. 동독 주민들이 그를 몰아내고 결국 선거를 통해 '독일연방'에 가입하는 선택을 했으니 말이다.

콜은 좌우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1990년 10월 마침내 통독이란 용의 눈을 찍었다. 독일 너머 전 유럽의 추모 기류는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말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페이스북을 통해 그의 위업을 기렸다. 다만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 성공하려면 콜이 그린 통독 설계도의 한쪽 면만 봐서는 안될 것이다. 콜은 통독을 반대하는 소련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해 고르바초프의 마음을 샀다. 하지만 '독일판 사드' 논쟁 때는 단호했다. 소련이 핵미사일인 SS-20을 동독에 들여오자 미제 퍼싱Ⅱ와 크루즈미사일을 배치하는 방안에 좌파가 태클을 걸었으나 주저 없이 정면돌파했다.

우리는 지금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김정은 정권이 핵무장을 완성하면 통일은커녕 '분단 고착화'로 갈 소지가 커진다는 점에서다. 그런데도 "사드로 한.미 동맹이 깨지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문정인 특보)는 식의 한가로운 수사가 넘치니 사뭇 걱정스럽다. 대화의 조건을 북핵 폐기에서 핵동결로 완화하려는 기미에서 정상회담 성사에 대한 새 정부의 조급증도 엿보인다.


브란트가 아닌 콜이 '통독의 아버지'로 우뚝 선 배경을 곱씹어 볼 때다. 평화공존에만 매달리지 않고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동독체제의 변화를 이끈 게 그 원동력이었을 듯싶다. 우리도 에둘러 가는 것같이 보여도 북한을 민주.시장경제.인권에 기반한 세계 문명사의 큰 흐름에 동참시키는 것이 통일의 지름길일 것이다.

kby777@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