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천장서 내뿜는 열기에 경비실은 찜통”

김규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6.29 17:07

수정 2017.06.29 17:09

무더위 본격 시작… 아파트 경비원의 고달픈 여름나기
새벽까지 열기 가시지 않고 모기 많아 문 열 수도 없어 쪽잠마저도 제대로 못 자
전기 계량기 달아 내역 확인.. 에어컨 설치는 꿈도 못꾸고 선풍기도 마음 놓고 못 틀어
28일 오전 11시께 서울 압구정동 A아파트 경비실. 오전 내내 햇빛을 받은 3.3㎡(1평) 공간에 열기가 후끈했다. 이날 서울의 낮 최고기온은 섭씨 31도, 선풍기 바람에도 경비실 천장에서 내뿜는 열기에 잠시 앉아 있는 동안에도 이마, 겨드랑이, 허벅지에 땀이 맺혔다. 본격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을 앞두고 경비원의 고달픈 여름나기를 취재했다.

나무 모자를 쓴 경비실 모습. 넝굴이 없으면 강한 햇빛으로 새벽까지 철제로 된 천장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나무 모자를 쓴 경비실 모습. 넝굴이 없으면 강한 햇빛으로 새벽까지 철제로 된 천장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1년째 정수기 필터를 갈아 본 적이 없어요. 찬 물은 마음대로 마실 수 있지요"

10년째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강모씨는 지난해 주민이 버린 정수기를 주워왔다.
여름철 찬 물이라도 실컷 먹고 싶어서다. 수돗물로 채운 2L 생수 용기를 정수기에 꽂아 쓴다. 매달 갈아야 하는 필터는 1년째 그대로다. 강씨는 "찬 물 먹으려면 관리사무소 오가는 데 10분 걸린다"며 "눈치가 보여 수돗물만 마신다"고 말했다. 이마저 발각되면 철거해야 한다. 여름철 땀 범벅이 돼도 아파트에서 냉수를 먹을 곳은 없다. 강씨가 아파트에서 정수기를 쓰는 유일한 경비원이다.

여름철 경비원에게 가장 힘든 점은 '더위'다. 오전부터 햇빛을 받은 경비실은 새벽까지 열기가 가시질 않는다. 선풍기는 금새 열풍을 내뿜고 산 모기가 많아 문을 열어 둘 수도 없다. A아파트 경비실에서 만난 허모씨는 "아파트 경비원은 격일제 근무를 하는데 하루는 꼬박 경비실에 있어야 한다. 새벽 0시부터 다음날 4시까지는 자야 하는데 열대야로 눈을 못 붙인다. 어느 날 아침에는 빗자루가 2개로 보이더라"고 털어놨다. 60세가 넘은 허씨는 새벽 시간 쪽잠을 빼앗는 더위로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다.

서울 압구정동 A아파트 경비원 강모씨가 사용하는 정수기. 주민이 버린 것을 사용하고 있다. 찬 물 마실 곳이 없어서다. 강씨는 이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정수기를 사용하지만 적발되면 곧바로 철거해야 한다.
서울 압구정동 A아파트 경비원 강모씨가 사용하는 정수기. 주민이 버린 것을 사용하고 있다. 찬 물 마실 곳이 없어서다. 강씨는 이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정수기를 사용하지만 적발되면 곧바로 철거해야 한다.

경비원들은 너무 더울 때면 경비실을 박차고 나간다. 허씨는 자신이 담당하는 아파트 한 동과 옆 동 사이 통로를 '명당'이라고 전했다. 바람이 잘 드나드는 공간인데다 나무 그늘이 있어 더위를 피하려 옆동 경비원까지 몰려 든다. 허씨는 "큰 나무 밑 마다 의자가 있는데 더울 때면 가는 곳"이라고 말했다. 경비실은 저마다 '나무 모자'를 쓴 모양새다. 천장에 넝쿨을 심은 것이다. 파라솔로 덮는 경우도 있다. 모두 햇빛을 막기 위해서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날 강남구 B아파트에서 만난 경비원 박모씨는 여름마다 '미어캣'으로 불린다. 박씨는 "더워서 나무 그늘 아래 서성이지만 경비실에 누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수시로 살핀다"며 "주민이 미어캣이라고 부른다"고 밝혔다. 사실 B아파트 100여명의 경비원들은 미어캣이 될 수 밖에 없다.

오후 주민 퇴근시간에 경비원 박씨는 주차장을 돌며 주민 차량을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박씨는 70여 세대의 차를 하루에만 100번 이상 옮긴다고 한다. 만보기에 표시된 걸음은 2만을 훌쩍 넘었다. 경비실 벽면에는 주민들이 맡긴 차 열쇠로 빼곡하다. 여름철에는 차 내부 온도가 높아 주차 일을 하고나면 온 몸에서 땀이 난다. 선풍기가 있지만 마음 놓고 쓰지 못한다.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실에 계량기를 달아 사용 내역을 일일이 확인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무 밑이 마음놓고 쉴 수 있는 유일한 피서 공간이다.

경비원들에게 에어컨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설치는 '개헌' 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난해 허씨 등 A아파트 경비원은 관리소장을 겨우 설득해 에어컨 도입 안을 입주자대표회의까지 올렸으나 무산됐다. 관리비 인상이 이유다. 올해도 주민들은 버리거나 남는 에어컨을 경비원에게 줬지만 관리소장은 "다른 경비실과 비교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해 재활용 쓰레기가 됐다. B아파트에서도 같은 이유로 에어컨이 설치된 적이 없다. 지난해 일부 주민이 개별적으로 주민 동의를 받아줬지만 "전기비가 많이 든다"며 거절당했다.

이달 말 서울 중랑구 한 아파트에서 경비실 에어컨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의 글이 붙었다.
'에어컨을 설치하면 지구 온난화가 심해져 수명이 단축된다'고 적혀 있었다. 박씨는 "우리를 파란 옷 입은 특이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같은 사람, 이웃으로 봐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박씨가 담당하는 아파트 1개동 72세대의 에어컨 실외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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