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국민연금에 어른거리는 정치 그림자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8.21 17:17

수정 2017.08.21 17:17

연금서 돈 빌려 임대 짓자는 '착한' 발상은 갸륵하지만 행여 소탐대실 될까 걱정
[곽인찬 칼럼] 국민연금에 어른거리는 정치 그림자

노무현 대통령은 통이 크다. 10년 전 임대주택 재고율을 당시 3%에서 2017년 20%로 높이는 정책을 내놨다. 재고율은 총 주택수에서 임대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2007년 초에 나온 1.31 대책은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완결판이다. 하지만 2007년은 참여정부의 힘이 쏙 빠졌을 때다. 자연 노 대통령의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빛을 보진 못했으나 노무현표 임대주택 구상은 부동산 정책사(史)에 남을 만하다. 노 대통령은 10년에 걸쳐 임대주택 260만채를 짓고 싶어했다. 여기서 키워드는 임대주택펀드다. 임대주택 사업엔 돈이 많이 든다. 주거복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정부 예산으론 어림없다. 토지공사.주택공사(2009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 합병) 같은 공기업을 동원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노 대통령은 국민연금에 주목했다. 국민연금.우체국.농협.생명보험사처럼 돈을 길게 굴리는 재무적 투자자들한테 돈을 빌려 임대주택을 짓자는 발상이다. 그 대신 투자자에겐 국고채 수익률+α의 수익을 보장한다고 했다. 손해가 나면 재정 곧 세금으로 메워주기로 했다. 한 해 5000억원 정도 재정지원이 필요할 걸로 예상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감을 보였다. 나중에 임대주택을 팔아 매각차익을 남기면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도 소규모 이익실현이 가능"하다고 봤다(2007년 1월 31일 재정경제부.건설교통부 보도자료).

노무현을 보면 문재인이 보인다. 문 대통령은 지난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신혼부부, 젊은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에 많은 정책을 준비 중이고, 곧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기는 9월 말이 될 듯하다. 큰 틀은 나왔다. 100대 국정과제에 보면 새 정부는 임대주택을 연 17만채씩 지을 계획이다. 재고율은 작년 6.3%에서 2022년 9%로 오른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임대주택펀드 정책도 계승할까. '펀드' 아이디어가 부활할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국민연금을 끌어들이는 건 분명해 보인다. 지난 4월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은 "정부가 보육, 임대주택, 요양 사업을 위해 국공채를 발행할 때 국민연금이 적극 투자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법적으로 국민연금은 공공사업에 투자할 수 있다(국민연금법 102조). 다만 조건이 붙는다. "국민연금 재정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기획재정부 장관과 협의해서 국채를 매입한다"고 제한을 뒀다. 문을 열되 함부로 투자하지 못하도록 브레이크를 건 모양새다.

진보성향의 전강수 교수(대구가톨릭대)는 정권과 무관하게 추진해야 할 부동산 '근본정책'으로 보유세 강화와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를 꼽는다('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중 '부동산 문제의 실상과 부동산정책의 전개'). '미친 월세, 미친 전세'를 잡는 데도 임대주택이 특효약이다. 서민 주거복지를 향한 노.문 두 대통령의 강철 의지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국민연금 기금으로 임대주택을 짓는 게 옳으냐는 또 다른 문제다. 국민연금은 가입자 2200만명의 노후를 책임진다. 임대주택에 견줘 공공성이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다. 문 대통령 스스로 "국민연금을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권력의 그림자는 국민연금 근처에 얼씬도 말아야 한다.
임대주택 연계는 소탐대실이 될까 두렵다. 정치는 국민연금에서 손을 떼는 게 옳다.
그것이 '박근혜 사태'가 남긴 교훈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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