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웃음과 메시지가 있는 건배사

지령 5000호 이벤트
우리 옛 선비들은 건배할 때 어떤 덕담을 했을까.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즈음에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을 읊으며 건배를 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자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얼마나 멋진 건배사인가.

건배는 한자로 마를 건(乾)자와 잔 배(杯)이다. 그런데 건(乾)자에는 '텅 비우다'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건배는 '잔을 비우다'라는 의미가 된다. 잔을 비우는 이유는 비운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다시 채우기 위함일 것이다. 새로운 것(The New)과 참된 것(The True)으로 채우기 위하여 건배를 한다고 여겨진다.

필자가 우리은행장으로 있을 때다. 은행 내 여러 행사나 회식을 할 때는 그날 모임을 주관하는 임원으로 하여금 개막을 알리는 건배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후렴으로 '위하여!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를 선창하면 전 참석자가 큰소리로 제창토록 했다. 또한 건배사에는 웃음과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런 건배가 지속되다 보니 재치있는 건배사로 인해 좌중으로 하여금 폭소를 자아내는 일이 많았다.

특히 목청 좋고 창의적인 내용으로 건배를 주도했던 두 임원분이 있었다.

필자는 이 둘을 CTO(Chief Toast Officer)로 구두 임명하고 건배 전문가로 활동시킨 바 있다. 은퇴한 지금도 당시의 임원 모임을 가지면 그때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줌으로써 즐거운 회식이 되곤 한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배사가 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평소 비교적 조용한 성품인 한 임원에게 건배를 한 번 제의하도록 했더니 벌떡 일어나 대뜸 한다는 건배사가 이러했다. '건배사 없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KPI (Key Performance Indicator) 없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이 건배사에 모두들 완전히 뒤집어졌다. 또 필자가 제의한 건배사 중에서도 큰 반응을 일으킨 것이 있다. '모두들 잔을 채우십시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면서 건배사를 영어로도 한두 가지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 샷(One Shot)!' 폭소가 터졌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간부들의 건배사를 듣고 있던 모 임원이 이를 한번 듣고 흘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책을 내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즉각 받아들여 우리은행 건배사 모음집 '위하여,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를 발간하기도 했다. 당시 타 은행이나 기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필자가 신용회복위원회에 재직할 때는 직원들의 삼행시 모음집을 내기도 했다.


필자는 펀(fun)경영의 일환으로 회식 때마다 건배를 여러 직원이 하도록 했다. 분위기에 걸맞은 건배사가 적절히 끼어들 때 훨씬 재미난 모임이 됐기 때문이다. 지나친 음주나 소란스러운 회식 분위기는 물론 자제돼야 하지만 회식 자리에 갈 때는 웃음과 메시지가 있는 건배사 하나쯤은 머리에 담고 참석함으로써 건전한 회식문화가 정착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종휘 전 우리은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