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fn광장

[fn논단] "어찌 유학자가 배울 학문인가"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9.04 17:15

수정 2017.09.04 17:15

[fn논단] "어찌 유학자가 배울 학문인가"

조선은 유교 국가다. 새 왕조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이 고려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를 국가 기본이념으로 도입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었다. 유교는 춘추시대 말기 살았던 공자의 어짊(仁)으로 몸과 마음을 닦아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상이다. 성리학은 수많은 제자에 의해 발전된 유교 중 송나라 주희가 집대성한 학문으로 고려 말 한반도에 들어왔다.

조선이 유교를 기본으로 했지만 세종 무렵까지는 '석보상절' 등 불교서적이 다수 우리글로 발간됐다.
또 과학기술 등 소위 잡학으로 불리는 학문도 중시됐다. 세종 때 농업서적 '농사직설'이, 의약서적으로는 '향약집성방'이, 천문 역서로 '칠정산내외편' 등이 편찬됐다. 지은이는 집현전 등의 문신들이었다. 예컨대 '칠정산내외편'을 저술한 이순지는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문과 대과에 합격한 유학자였지만 세종의 명에 따라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

이처럼 실용학문을 비롯한 다양성이 허용되던 조선은 왜 다른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경직됐을까. 세조 10년(1464) 8월 6일자 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판종부시사 남윤, 감찰 김종직 등은 임금과 대화 모임을 가졌는데 김종직이 아뢰었다. "지금 문신에게 천문, 지리, 음양, 음악, 의약, 점술, 시와 역사 7가지 학문을 나누어 닦게 하는데 시와 역사는 본래 유학자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이야 어찌 유학자들이 마땅히 힘써 배울 학문이겠습니까. 또 잡학은 각각 직업으로 하는 자가 있으니, 만약 권장하고 징계하는 법을 엄하게 세우고 다시 교양을 더한다면 자연히 모두 정통할 것인데, 그 능통하는 데에 반드시 문신이라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여러 학문을 하는 자들이 모두 변변치 못한 무리인지라 오로지 그 일에만 마음을 써 뜻을 이루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미천한 일이라 하나 나도 또한 대강이나마 일찍이 섭렵하면서 그 분야에 얼마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이조에 명을 내리기를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 관련 관청에 내려 그 정상을 국문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미 임금과 신하의 대화 모임의 법을 세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견을 다 말하게 하는데, 또 말한 자를 죄준다면 언로가 막힐 것이니, 그것을 중지하고 파직을 시키라"라고 하였다.

세조가 최고 엘리트 문신들에게 천문, 지리, 의학 등 실용학문을 나눠 공부하게 하자 김종직이 임금의 면전에서 반발한 것이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와 더불어 길재에게 성리학을 배워 정몽주-길재로 이어진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세조에게 홀대 받던 김종직은 그 후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사림파의 영수'로 자리 잡게 된다. 그가 길러낸 김굉필, 정여창 등이 국정의 핵심인물이 되어 조선을 성리학 국가로 변모시켰다.


성종 이후 김종직 등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파가 중용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또 성리학은 조선의 자부심으로 정치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도 컸다.
그러나 좋은 것도 지나쳐 다양성을 해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