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로]

하룻밤 고택

프랑스 파리에서 13년 생활을 끝내고 2년전 한국에 들어온 지인이 최근 카톡을 보냈다. 9월 주말마다 자신의 집에서 여는 자그마한 전시회 초대 내용이었다.

서울 서촌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은 그녀의 집을 나는 잠시 들렀던 기억이 난다. 나무와 꽃, 테이블로 꾸며진 소박한 마당, 방이 둘, 그 사이 마루, 부엌과 욕실로 이어진 ㄱ자형 한옥. 기둥 몇 개만 남은 사실상 폐허에서 '지금의 집'이 된 그곳에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었다. 크기는 아담했지만, 파리에서 설치미술을 전공한 이 여인의 손을 거쳐 우리 전통이 은은한 빛깔의 근사한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전시회 타이틀은 '집'이다. 집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는 자리라고 한다. 관람객은 대부분 그녀의 광범위한 이웃들이다. 나는 9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시간에 동그라미를 쳐서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문득, 집의 색깔이 주인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도 떠올려봤다.

연일 38도를 웃돈, 지난해 여름 한복판 내 휴가지는 경북 안동 일대였다. '500년 고택 기행'을 오래전부터 원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무덥던 나날 이 여행이 감행됐다. 하루하루는 실로 다채로웠다. 처음 들렀던 고택에서 우리를 맞은 세련된 스타일의 도회지 출신 종부님은 그 집에서 가장 전망 좋은 방을 내주셨는데, 바깥 풍경은 너무나 근사했지만 세 명의 식구가 지내기에 내부는 비좁았다.

종부님은 약속에도 없던 전통 문화체험을 공짜로 가이드해주셨다. 남편의 거듭된 사양에도 등목을 강제로 시켜주셨고, 아들에게는 자기 소개법을 가르쳐주셨는데, 그에 앞서 부모 소개가 필요하다 하셔서 남편과 나는 마주보며 번갈아 자기 소개 시간을 가졌다. 굉장히 주도적인 종부님이셨기에 우리 가족은 감히 이 모든 것에 거역을 못했다. 그 500년 고택의 하룻밤은 내게 500년 같았다.

고택체험 마지막은 퇴계 선생 생가였다. 퇴계 큰아버지 후손이 대대로 물려받은 곳으로, 퇴계 태실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예약자는 여러명이었으나 실제 그날 거기 나타난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종부님은 널찍한 마루의 사랑채를 내주셨다. 마루에 앉으니 담장 너머 전깃줄에 나란히 자리잡은 참새들이 보였다.

종부님은 볼일이 있어 나가시면서 대문을 잠그지 않으셨는데, 이 집에선 한 번도 대문을 잠근 적이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고도 도둑 한 번 든 적 없었다 하니 이 집의 위엄이라고 해야 할까. 해질녘까지 그 큰 집에 우리 식구와 강아지 누리만 덩그러니 있었다. 한 차례 소나기가 내렸고, 마루에 누워 그 시원한 빗소리에 휴가의 고단함을 다 씻어냈다.

집은 그렇게 주인의 마음을 담는다. 내 집은 그렇다면 어떨까. 그나저나 집에 눈 뜨고 있을 시간이 있어야지. 이건, 직장인의 숙명일 수도.

jins@fnnews.com 최진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