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한국판 적기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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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했지만 정작 자동차산업은 발달하지 못했다. 1865년 마부들의 일자리 보호를 위해 만든 '붉은 깃발법(적기조례.Red Flag Act)' 때문이다. 내용도 황당하다. 한 대의 자동차에는 운전수.기관원.기수 3명을 고용해야 한다. 기수는 붉은 깃발을 들고 55m 앞에서 자동차를 선도해야 한다. 최고속도도 시속 3.2~6.4㎞로 제한했다. 마차보다 느린 증기자동차를 타라는 억지다.

반발이 커지자 영국 의회는 1878년 규제를 일부 완화했지만 개악이 됐다. 말을 놀라게 하는 연기나 증기를 내뿜지 말라는 조항을 추가해서다. 이번엔 말과 사람의 안전과 환경 때문이었다. 그 사이 외국차 성능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결국 붉은 깃발법은 1986년 폐지됐다. 결과는 참담했다. 외국차에 밀려 영국 자동차산업은 몰락했고 마부의 일자리까지 사라졌다. 마차 시대의 기준으로 자동차를 규제한 결과다.

먼 나라, 옛날얘기가 아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은산분리법과 대규모기업집단과 동일인(총수) 지정 제도가 대표적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확장과 불법적인 부의 세습을 막기 위한 명분이지만 30여년이 흐른 지금은 철 지난 옷일 뿐이다.

벌써 부작용이 나타난다. 올해 출범한 인터넷은행인 케이뱅크와 카카오뱅크는 돌풍을 일으키며 금융권의 메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대출이 급증하면서 자본금을 늘려야 하는데 은산분리 족쇄 때문에 여의치 않다. 출발도 늦었는데 한쪽 바퀴로 굴러가는 모양새다. 기업집단제도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네이버가 준대기업집단에, 이해진 창업자가 총수에 지정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외국에는 없는 총수라는 개념을 만들어 저지르지도 않은 비리를 규제하는 꼴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버.딥마인드 등 세계 100대 스타트업이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면 13곳은 불법, 44곳은 사업 모델을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이 3000만명의 고객을 확보한 원격진료도, 빅데이터 활용도 한국에선 막혀 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업은 한국에서는 일단 불법이다. 세계 최초로 기술을 개발해도 실험하러 외국으로 가는 처지다.

정치인의 낡은 사고방식이 문제다. 국회는 이 핑계 저 핑계 들이대며 신산업과 기존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문재인정부도 규제개혁이란 말은 쑥 들어갔다. 최근 호석 리 마키야마 유럽국제정치경제연구소(ECIPE) 소장은 '유교사상과 시장개혁'이라는 제목의 해외 언론 기고에서 과거 봉건시대의 유교주의적 질서가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양복 입고 갓을 썼다는 비판이다.

거리에는 자율주행 전기차들이 넘쳐나고, 무인 비행기와 선박이 사람과 짐을 실어나른다. 이런 변화가 몇년 남지 않았다. 서서히 오는 게 아니라 스마트폰처럼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해외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신사업을 할 수 있게 일단 허용하고 문제가 될 부분만 골라 규제한다. 한국은 거꾸로다.
모든 것을 규제의 틀에 넣은 뒤 마지못해 조금씩 풀어준다. 규제의 틀뿐 아니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는 4차 산업혁명이든 뭐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적기조례가 남의 일이 아니다.

mskang@fnnews.com 강문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