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밥값’에 대한 단상

이환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9.14 17:24

수정 2017.09.14 17:24

[기자수첩] ‘밥값’에 대한 단상

"적포도주의 병 바닥에는 타닌과 폴리페놀 덩어리인 '침전물'이 서서히 쌓여간다. 침전물은 와인의 쓰고 떫은맛이 모인 것이므로 침전물이 쌓임에 따라 윗부분의 맑은 와인은 달고 부드러워진다. 세상과 함께 투명해지는 와인, 인간도 그러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와인을 소재로 한 '신의 물방울'이란 만화의 작가가 한 말이다.

시간과 더불어 숙성하는 와인처럼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성숙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일을 시작하고 와인을 마실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더러는 내가 사기도 했고, 더 많은 경우 누군가의 덕분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좋은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어느 날 문득 '나이를 먹고 시간을 소화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우리말에 높임말과 존대가 있는 것도 시간의 지층을 단단히 쌓아온 인내에 대해 당연히 표해야 하는 존경과 경의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자, 술, 담배 등 식음료회사들을 출입하면서 먹고사는 것, 특히 밥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밥벌이의 고단함과 엄숙함에 대해, 목구멍이 포도청인 현실에 대해 등등. 세상이 각박해지면서 '일→돈→밥'의 고리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일자리는 줄고, 돈 벌기는 힘들고, 밥은 잘 안 넘어간다.

서른 셋. 지금까지 참 많은 쌀알과 포도를 씹어 삼켰다. 하루 삼시 세끼를 먹으면 1년에 총 1059끼를 먹는다. 대충 계산해도 지금껏 나는 3만4000끼에서 3만6000끼 정도를 먹었다. 하지만 내가 그만큼의 '밥값'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가치 있는 일을 하자'던 어릴 적 결심이 이것저것에 치이며 '밥값은 하자'로 바뀌는 것을 보며 '나는 밥을 어디로 먹고 있나' 하는 자괴도 든다.

시인 함만복은 그의 시 '긍정적인 밥'에 '시(時) 한 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라고 적었다.


TV 뉴스를 보며 내 세금으로 월급 받아놓고서는 쌈질만 하는 국회의원을 욕하려다 참는다. 오늘은 점심에 8000원짜리 곰탕을 얻어먹었다.
나는 지금 기자수첩의 마지막 문장을 쓰는 중인데 이게 8000원 가치가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부끄럽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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