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yes+ Culture] "고래가 수면을 향해 입을 벌렸을 때 뱃속으로 들어오는 빛, 상상해 봐요"

박지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1.09 19:48

수정 2017.11.09 22:45

빛으로 고래 뱃속 표현한 설치미술가 '리경'
3년만에 송은아트스페이스서 개인전
'more Light:향유고래 회로도' 진행
빛의 생성.소멸 통해 삶과 죽음 표현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면 분명 서있는데도 마치 무중력 상태에 둥둥 떠있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이곳이 어디인지, 시간은 존재하는지 시.공간의 영역이 뒤틀린 4차원의 세계 속에 빠져든 것 같은 불안한 느낌. 그 가운데 신의 목소리 같은 한줄기 빛이 비춰지면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나는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홀로 어둠의 시간을 보내면서 신의 뜻을 깨닫고 성숙해진 것처럼 말이다. 형체가 없는 빛과 어둠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깊은 사유를 하게 한다.

[yes+ Culture]


설치미술가 리경(48·사진)의 'more Light:향유고래 회로도'전이 진행되고 있는 서울 청담동 송은아트스페이스에 들어서면 이런 사색에 빠져들게 된다.

"소설 '모비딕' 아시죠? 거기에 나오는 고래가 바로 '향유고래'에요. 세상에서 가장 큰 신비한 흰 고래인데 한번도 인간에게 포획된 적이 없어서 이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고 해요. 지식이 비어있는 공간에 사람들의 상상이 더해져서 굉장히 포악한 동물로 이미지가 남아있죠. 그런데 저는 거친 바다를 헤엄치며 살아가는 그 고래의 모습이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칠흑과 같이 어두운 전시장 한켠에서 만난 리경 작가는 "소란스러운 밖에서 거칠게 살아가면서도 그 안은 적막으로 가득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며 "예전부터 고래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는데 빛을 다루는 제 작업에서 암흑이 가장 좋은 전시의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20여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해온 그가 3년만의 개인전을 열기 위해 송은아트스페이스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 마침 예전부터 상상해온 향유고래의 뱃속과 같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래서 전시 제목에 '향유고래 회로도'란 부제가 붙었다. "향유고래의 길이가 19~23m정도 된다는데 건물 높이도 비슷하고요."

중층을 포함한 4개층으로 이뤄진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면 1층 바닥에 두 개의 정사각 물체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바닥부터 꼭대기층 천장까지 뚫려있는 한쪽 공간에 놓여진 이 물체의 정체가 궁금해 다가가는 도중 위에서 강렬한 흰 빛이 내리쬔다. 마치 고래가 수면을 향해 입을 벌렸을 때 들어오는 햇살처럼, 그제서야 은빛 자개로 싸인 물체의 표면이 달과 같이 빛을 발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신탁과 같은 빛 기둥은 이내 사라지고 잔상이 눈에 어른거린다. 켜지고 꺼지고, 시차를 두고 교차되는 빛. 리경 작가는 "빛의 생성과 소멸을 통해 탄생과 죽음을 향해가는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yes+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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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업을 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죽음에 대해 잘 바라보지 않으려 하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소멸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느 한쪽만 존재할 수 없어요. 이러한 이야기를 빛과 어둠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말을 이어가던 작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그는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며 개인적인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개인전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있어요. 제 작품 활동의 동력 중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어요. 그런데 최근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18년 가까이 쌓아왔던 원망이 미안함으로 바뀌는데 15분도 안걸리더라고요. 온기가 남아 있지만 점점 굳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주변의 모든 살아있는 것이 움직이는 이 상황 속에서 모든 경계가 오묘하게 느껴졌어요. 그러면서 살아있는 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응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번 개인전은 그런 감정의 변화 가운데서 작업을 하게 됐어요."

아버지의 소천 이후 그의 심경 변화는 전시장 3층에서 작업한 그의 레이저 작품 '아이 캔 씨 유어 할로(I can see your halo) 씬 넘버 03'에서 두드러진다. 리경 작가는 "아버지께 바치는 작품"이라고 했다.

'안과 밖'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눠진 전시장 3층의 밖에는 귀를 거슬리게 하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레이저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레이저로 만든 계단과 같은 공간을 지나 내부의 공간을 향해 들어가면 주황색 싸이키 조명이 갑자기 눈앞에 닥친다. 눈부심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이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히 고즈 투 더 스카이(He goes to the sky!)"

리경 작가는 "저의 내면 속 두려움과 불안함을 표현한 것이었다"며 "늘 회피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는데 오히려 끝을 보는 순간, 제 자신의 존재를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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