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영 칼럼]

코리아 패싱은 없다

슬픈 과거 반복하지 않으려면 역사인식과 반미를 구분하고 한반도 문제에 제목소리 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난주 동아시아 순방은 미국과 한.중.일 등 4국 간의 역학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한.중.일 3국 정상들은 트럼프 미 대통령을 향해 치열한 구애경쟁을 벌였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대통령을 한 발짝이라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그가 구사한다는 미치광이 전략의 직격탄을 얻어맞지 않으려고 전력투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경쟁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청와대 정상회담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어느 기자가 "코리아 패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리아 패싱은 없을 것(There will be no skipping South Korea)"이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그는 정상만찬과 다음날 국회 연설 등에서 여러 차례 한국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 걱정했던 무역역조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발언도 최대한 자제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에게는 "코리아 패싱은 없다"는 말 한마디가 다른 어떤 찬사보다 값진 선물이었을 것이다.

코리아 패싱은 한반도 문제 논의의 장에서 당사자인 한국이 소외되고 있다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말로는 '한국 건너뛰기' 정도로 옮길 수 있다. 북핵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 중국 등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이 한국을 '왕따' 시키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대선에서 보수 진영 후보들은 이런 구도를 설정해 문 후보를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TV토론회에서 이 카드를 꺼내들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에 반대하는 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과의 갈등이 커져 코리아 패싱이 더 심해지지 않겠냐며 공세를 폈다. 문 후보는 "미국이 무시할 수 있는 나라를 누가 만들었나. 부끄러워하셔야죠"라고 반박했다.

한국인의 코리아 패싱에 대한 두려움은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1905년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양해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소련과의 세력균형을 위해 한반도 분할을 묵인했다.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는 것과 반미는 다르다. 미국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일본은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 움직인다. 한국은 과거 그러지 못했던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코리아 패싱은 우리가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스스로 강해지는 길밖에 없다.

미국은 우리가 어려울 때 함께 피 흘린 혈맹이다.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우리 안보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은 지난 67년간 유지돼온 한·미 동맹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방한에서 "힘으로 평화를 지키겠다"고 한 약속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한국을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점도 엄연한 현실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한국은 한국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코리아 패싱이 두려워 발언권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코리아 패싱이다. 국제관계는 어느 일방의 호의가 아니라 냉정한 국가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북핵을 포함해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국민적 염원이다.
그 염원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 정치인들에게 부여된 책무다. 국제사회도 이를 존중해야 한다. 코리아 패싱은 없어야 한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