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사설]

초대형 투자銀, 또 시늉으로 그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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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골드만삭스' 원하면 사전규제 과감하게 풀어야

금융위원회는 13일 한국투자증권 등 5개 증권사를 초대형 투자은행(IB)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핵심 발행어음 업무는 한투에만 인가했다. 한투는 어음을 발행해서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이렇게 조달한 자금은 벤처.중소기업에 투자한다. 한투 한 곳만 발행어음 인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팡파르를 울릴 정도는 아니지만 초대형 IB가 첫발을 뗀 것은 의미가 크다.

덩치 큰 IB는 진작에 나왔어야 한다. 두가지 이유에서다. 먼저 투자은행은 혁신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은행은 체질적으로 모험자본과 거리가 멀다. 그 점에서 박근혜정부는 실책을 저질렀다. 기술금융이라는 이름 아래 은행에 벤처.중기 투자를 종용한 것은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모험투자는 원래 벤처캐피털이나 투자은행 몫이다. 미국에선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투자은행들이 에어비앤비, 우버 같은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우리도 이런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달 "혁신성장을 위해서도 증권업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옳은 말이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에서 거대 프로젝트를 딸 때도 초대형 IB가 필요하다. 수백억달러짜리 대형 프로젝트는 파이낸싱, 곧 자금조달이 성패를 가른다. 금융과 실물이 고르게 발전한 선진국은 제조업체와 IB가 짝을 이뤄 유리한 파이낸싱 조건을 제시하는 전략을 편다. 우린 수출입은행이나 무역보험공사 같은 국책 금융기관이 그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예산을 쓰는 국책은행은 한계가 있다. 앞으론 한투 같은 민간 IB가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

걸음마는 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사실 '초대형 IB'란 표현도 좀 민망하다. 국내에선 자본금 4조원이면 초대형일지 모르나 국제 기준에서 보면 여전히 구멍가게 수준이다. 우리도 번듯한 투자은행을 키우자는 논의는 적어도 10년 전부터 나왔다. 자본시장법은 2007년 노무현정부 때 제정됐고, 2년 뒤인 2009년부터 본격 시행됐다. 하지만 지난 8년간 자본시장법은 맥을 못췄다. '한국판 골드만삭스' 타령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말만 무성할 뿐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왜 그럴까. 금융당국이 투자은행을 상업은행처럼 시시콜콜 규제하려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다. 투자은행은 과감한 투자가 특징이다. 그러려면 먼저 재량권을 줘야 한다.
은행에 적용하는 깐깐한 사전규제는, 때론 무모한 벤처 투자를 감행해야 할 투자은행의 발목을 잡는다. 이왕 정부가 투자은행을 육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행동도 달라지길 바란다. 당국이 사전규제의 끈을 놓지 않으면 10년 뒤에도 '한국판 골드만삭스' 이야기가 또 나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