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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 히로시마의 예술섬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1.27 17:13

수정 2017.11.27 17:13

[윤중로] 히로시마의 예술섬

거대한 투명 유리패널을 관통해 시선이 닿은 곳은 그 섬 끄트머리 앞에 펼쳐진 바다였다. 대나무 숲속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지그재그로 오른 뒤 마주한 미니 갤러리에 그 작품이 있었다. 동독 출신의 현대미술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가 이곳 일본 히로시마 도요시마 섬 일출에 영감을 받아 설치한 유리 구조물.

독일산 소나무 받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고정된 10여장 일본산 대형 유리패널은 전시실 입구 반대편 유리벽면을 한방향으로 바라보며 공간을 채웠다. 바깥 대숲에서 들려온 서걱서걱 바람소리가 이 유리들에 말을 거는 듯했다. 작품은 이 공간이 아니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딱 이곳에 있어서 거장의 진가를 드러낸다. 작품 위치, 방향 일체는 리히터가 직접 결정했다.


히로시마 앞바다 무수한 섬 중 리히터 같은 대가의 미술을 두고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섬은 한때 노부부가 반려견을 키우며 산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무인도나 다름없었던 것이 지금은 일본 비정부기구(NGO) 피스윈즈재팬의 민간 소유가 됐다.

외국 슈퍼리치들은 이곳을 크루즈선급 초대형 요트를 타고 들어온다. 대부분 연간 조단위 수입을 올리는 미국인들인데, 해외 각종 요트쇼 에이전시로부터 정보를 얻어 우연히 왔다가 다시 들르는 경우도 있다. 슈퍼리치들은 단 네 채밖에 없는 펜션을 통째로 빌려 휴식을 취한다. 리히터 설치미술을 감상하고, 도쿄 출신 최고 셰프가 해주는 식사를 즐긴다.

섬 주인 피스윈즈재팬 오니시 겐스케 대표는 요즘 이들 슈퍼리치와 일본 신진 예술가 교량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충분히 주목할 만하지만 국적이 분쟁지역이거나 인지도가 낮아 활로가 없는 신진 작가를 위해 갤러리를 짓고 그 옆에 도서관, 숙소도 함께 들일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섬은 일본 신진 작가들의 아트마켓이 되는 셈. 현재 반려동물 보호사업도 펼치고 있는 그는 애초 이곳을 '강아지섬'으로 하려다 '예술섬'으로 구상을 바꿨다고 했다.

눈여겨볼 만한 건 오니시 대표의 정체성이다. 올해 50세인 그는 글로벌 재난 구조구호 활동 전문가로 활약 중인 NGO 리더다. 이끌고 있는 여러 민간단체들은 주력분야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지향점은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점에서 맥이 일치한다. 이 분야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영국에서 평화학을 공부하다 이라크 분쟁지역에 들어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였다. 리히터와의 친분 역시 분쟁, 난민 문제에 대한 높은 공감대에 기반한다.

그는 정부가 방치하거나 놓친 영역을 찾아 불같이 뛰어든다.
주식회사 등 영리법인도 설립해 비영리법인 재정을 보완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제야 시작"이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이 역동적인 일본 활동가에게서 한국 NGO들이 참고할 게 많지 않을까, 섬을 빠져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jins@fnnews.com 최진숙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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