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예산안 '졸음 심사' 멈춰야

이태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2.07 16:57

수정 2017.12.07 16:57

[기자수첩] 예산안 '졸음 심사' 멈춰야

졸음은 때때로 치명적 결과를 불러온다. 단 2~3초 졸음운전이 운전자를 저승으로 몰고 가는 것처럼 말이다. 국회에도 졸음 주의보가 떨어졌다. 연일 새벽까지 이어진 회의 탓에 목숨만큼 값진 나랏돈 수백조원이 '비몽사몽' 간 심사됐다. 가까스로 예산안은 통과됐지만, 어떤 비극적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이다.

이번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위 회의에 풀기자(대표 취재기자)로 들어간 적이 있다.
늦은 밤 진행된 '졸음심사' 현장을 지켜본 순간이다. 예결위 소속 한 국회의원은 회의장을 찾은 정부부처 관계자에게 "원안유지 통과율이 높은 시간대에 오다니 운이 좋다"고 인사를 건넸다. 모두 지친 시간에 왔으니 꼼꼼한 심사를 받지 않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인사다.

실제로 시간이 늦어질수록 의원들의 예리함도 점점 무뎌졌다. 벌게진 눈을 껌벅거렸고, 하품 빈도수도 늘어갔다. "집에 갈 시간도 늦었는데 삭감하지 말고 원안유지 시켜주자"거나 "이번 것을 통과시켜주면 다음 안은 삭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식의 예산안 내용과 관계없는 농담도 이어졌다. 회의를 지켜보던 한 예결위 직원은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너무 대충대충 한다"며 혼잣말로 탄식했다.

예산안 심사에 나선 의원들의 노력을 모르는 바 아니다. 법정처리 시한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심사속도를 내야 했던 진심도 안다. 그러나 국회의원도 사람이다. 녹초가 된 몸으로 예산안 심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속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정확한 심사다. 429조원이나 되는 나라살림을 꼼꼼하게 살피기에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심사기간은 너무 짧다. 더구나 올해 예결위 종합심사는 지난해보다 열흘 이상 늦게 시작했다. 어찌 보면 시간에 쫓긴 졸속 심사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상임위 예비심사 연장과 이에 엇물린 국정감사 등 빡빡한 국회 일정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어떤 '탓'을 하기에 나라살림을 결정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심사기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정치권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결위 '졸음심사'가 끝나자 풀기자인 내게 한 의원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는 "너무 심각하게 보지 말고, 재밌게 봐주세요"라며 웃었다.
농담처럼 넘겼던 예산안 수십억원 때문에 누군가는 평생 좌절하며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golee@fnnews.com 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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