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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정국 민주당 원내대표 우상호 의원의 ‘박근혜 탄핵 100일의 기록’

김호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2.07 17:42

수정 2017.12.07 23:09

“광장서 욕 먹었지만 국회에 집중해 결국 탄핵 이뤄냈죠”
잠 못들던 100일
하루에도 10표씩 왔다갔다.. 표결 전날 최종 탄핵 확신
예측한 것 보다 10표 많아.. 국민들 촛불의 힘 실감
6월 항쟁의 경험
과거 광장의 교훈 되새겨 제도권 결실 위해 최선
국민의당 비박 설득에 사활.. 당시 경험 백서로 발간 예정
'2016년 9월 1일부터 2016년 12월 9일까지' 한국정치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100일이다.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탄핵정국이 본격 시작되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아픈 역사의 한페이지 한페이지가 쓰여진 나날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원내사령탑으로 탄핵안 가결을 진두지휘한 우상호 의원에게는 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순간들이다. 탄핵안 가결(9일) 1주년을 3일 앞둔 지난 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우 의원을 만나 당시에는 말하지 못했던 긴박했던 탄핵정국 상황과 소회를 들어 보았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전 원내대표가 지난 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박근혜 탄핵안' 가결 1년을 맞아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긴박한 상황과 소회를 밝히고 있다. ■약력 △55세 △서울 용문고등학교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연세대 총학생회장 △17.19.20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민주통합당 제19대 총선 전략홍보본부장 △민주당 국정원개혁운동본부 국민홍보단장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보단장 △제20대 국회 1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선 공동선대위원장 △중국 연태대학교 객좌교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전 원내대표가 지난 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박근혜 탄핵안' 가결 1년을 맞아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긴박한 상황과 소회를 밝히고 있다.
■약력 △55세 △서울 용문고등학교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연세대 총학생회장 △17.19.20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민주통합당 제19대 총선 전략홍보본부장 △민주당 국정원개혁운동본부 국민홍보단장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보단장 △제20대 국회 1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선 공동선대위원장 △중국 연태대학교 객좌교수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가결까지 매일매일이 위기"

우 의원은 탄핵안 가결이 결정되기 전까지 하루하루가 '위기'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루에도 10여표씩이 왔다갔다 했다"고 긴박했던 분위기를 설명한 우 의원은 "말도 못할 정도로 초조해서 잠도 못잤다. 탄핵안을 가결 못시키면 정치생명도 끝낸다는 생각까지 했다. 무슨 낯으로 국회의원을 할 수 있겠냐"며 당시 감내해야 했던 말 못할 고통과 각오를 털어놓았다.

탄핵안 가결에 확신을 갖게 된 것도 국회 본회의 표결 바로 전날이었다고 한다.

우 의원은 "비박계(비박근혜계)에서 '4월 퇴진 6월 대선'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수용 여부를 7일까지 알려달라고 최종 통보를 했다"며 "7일 당일까지도 혹시 박 전 대통령이 수용할까 걱정했는데 결국 받질 않았고 7일 밤 부터 8일 아침까지 비박계가 모여 '탄핵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입장 정리한 것이 확인되면서 겨우 한시름을 놓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 의원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운명의 탄핵안 표결이 있었던 12월 9일 또 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개표 결과 때문이다.

그는 "개표하고 깜짝 놀랐다"며 "예측했던 것 보다 10표가 더 나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은 국회의원 234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우 의원은 개표결과를 보면서 '촛불민심의 위대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정치권이 보수다, 진보다, 개혁이다하지만 민심을 두려워하는 기본적인 생각은 다 있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반영된 것"이라면서 "박 전 대통령과의 의리냐, 국민들의 명령을 따르느냐 사이에서 (여당 의원들도)계속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 의원은 이어 "사실 (여당)의원들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비밀투표라고는 해도 개인적인 양심도 있고, 인간적인 관계와 대한민국을 오래도록 혼란스럽게 할 수 없다는 고민을 매일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기보다 결실이 중요했다"

우 의원은 탄핵안 가결의 중요한 밑거름 중 하나로 '6월 항쟁의 경험'을 꼽았다. 당시 현장지도부로서 '광장의 외침' 만큼 '제도권의 결실'이 중요하다는 점을 체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6월 항쟁때 광장지도부였는데 6.29선언이 발표되자 광장이 텅비고 운동권만 남았다"며 "목소리만 크고 강하다고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배웠다. 결국 끝을 맺는 건 제도권의 몫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밝혔다.

'광장보다는 반보 뒤에 간다'는 기조를 세우고 광장보다 국회에 집중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 의원은 "왜 강경하게 (국회)밖으로 나가지 않느냐며 광장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며 "하지만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면 4.19 때 처럼 유혈사태가 나야 하는데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광장이 원하는대로 따라가 하야만 외치고 시위만 했다면 인기는 올라갔겠지만 결실(탄핵)은 맺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광장으로부터 욕은 먹었지만 끊임없이 비박계를 설득하고 박지원(당시 국민의당 원내대표) 의원과 야권 연합을 이끌어내면서 단계적으로 접근한 것이 결국 탄핵으로 갔다"고 자평했다.

심하게 흔들렸던 비박계도 우 의원이 국회에 치중했던 이유다.

그는 "당시 비박계가 너무 흔들렸다. 이해도 되는게 모시던 대통령인데 탄핵표를 던진다는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키를 잡고 흔들림없이 끌고 가는게 내 역할이었다. 만약 흔들려서 왔다갔다했으면 탄핵안 가결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추했다.


우 의원은 "6월 항쟁 때는 20대 지도부로 거리 투쟁을 지도했다면 이번에는 제도권의 지도자로 끝을 냈다"며 "6월 항쟁은 그해 대선에서 실패하며 미완의 항쟁으로 남았지만, 이번엔 정권교체로 이어졌으니까 기승전결이 완성된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고 소회를 전했다.

한편, 우 의원은 숨가쁘게 흘러간 '탄핵안 가결 100일간의 기록'을 백서로 만들어 발간한다.
그는 "대통령 탄핵은 대한민국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엄청난 역사적 장면인데 정당차원의 기록이 없으면 안되지 않겠냐"며 "당시 원내대표로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해 발간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fnkhy@fnnews.com 김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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