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금융지주를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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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회장이 연임을 하든 말든 당국은 끼어들 자격 없어
정작 사라져야 할 건 관치

황영기를 보면 한국 금융이 보인다. 그는 원래 삼성맨이다. 삼성증권 사장을 지낼 만큼 그룹에서 잘나갔다. 그러다 2004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행장이 됐다. 4년 뒤엔 KB금융지주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호사다마라던가, 우리금융에 있을 때 파생상품에 투자한 게 뒤늦게 발목을 잡았다. 금융위원회는 사퇴를 종용했다. 관치 논란 속에 2009년 황영기는 물러났다. 그 대신 소송을 냈다. 법정에서 금융위 제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2013년 대법원은 황영기의 손을 들어줬다.

가만 있을 황영기가 아니다. 2015년 그는 금융투자협회장으로 복귀했다. 친정 증권가로 돌아온 셈이다. 3년 가까이 힘차게 뛰었다. 연임은 떼어 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근에 돌연 회장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 변이 흥미롭다. "제가 살아온 과정과 현 정부를 끌고 가는 분들이 결이 다르다." 얼마나 다르길래? "나는 시장주의자이지만 현 정부는 강한 정부, 큰 정부로 가려 한다."

나는 내심 황영기가 꿋꿋이 버텨주길 바랐다. 하지만 '2009년의 추억'이 그를 주저앉힌 것 같다. 당국과 붙어봤자 이기기 힘들고, 소송에서 이겨봤자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정권이 바뀐 뒤 황영기는,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페르소나 논 그라타', 곧 기피인물이 됐다. 시장과 자율을 외치는 황영기의 퇴진은 한국 금융의 비극이다. 그 밑바닥엔 관치라는 괴물이 있다.

그 괴물이 또 꿈틀댄다. 이광구 우리은행장은 '알아서' 나갔다. KB금융지주 윤종규 회장은 용케 화살을 피했다. 이제 과녁은 3연임에 도전하는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을 정조준한다. 금융위원장과 금감원장이 더블펀치를 날리고 있다. 이른바 셀프연임을 문제 삼았다. 최종구 위원장은 "현직이 자기가 계속할 수 있게 여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흥식 원장은 "승계 프로그램이 형식적이고 불공정하다"고 말했다.

승계 프로그램이 어떻길래? 따지고 보면 죄다 금융당국이 승인한 프로그램들이다. 2009년 KB금융, 2010년 신한금융에서 거푸 승계 리스크가 불거지자 당국은 오랜 논의 끝에 2014년 겨울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만든다. 핵심은 경영권 승계다. 이를 토대로 이듬해 국회는 금융사지배구조법을 제정했다. 법과 규준엔 회장을 뽑는 절차와 방식이 자세히 적혀 있다. 다시 이를 바탕으로 금융지주사들은 내부규범을 만들었다. 물론 당국 승인을 거쳤다.

금융사지배구조법은 작년 8월부터 시행됐다. 이제 겨우 1년4개월째다. 금융지주사들이 새로운 법에 막 적응하는 단계다. 그런데 뭐가 급한지 당국은 경영권 승계 프로그램에 문제가 많다고 닦달한다. 솔직해지자.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예전 회장이 자꾸 연임하는 게 꼴보기 싫은 거다. 한마디로 자리를 내놓으라는 거다. 이게 민간 상장사를 상대로 정부가 21세기에 할 일인가. 금융지주사들은 외국인 지분율이 70%를 넘나든다. 무슨 근거로 정부는 민간 금융사 회장 자리를 넘보나.

승계 과정이 100% 완벽할 순 없다. 그러나 관치 폐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한국 금융은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뛴다.
그 모래주머니가 바로 관치다. 애써 만든 승계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는 건 다름 아닌 정부다. 도장을 찍었으면 좀 느긋하게 지켜보라. 나는, 능력만 있다면 외국처럼 10년, 20년씩 장수하는 금융그룹 CEO(최고경영자)를 보고 싶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