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

평화주의자의 실패한 유화정책

전쟁과 평화는 결코 가볍게 논할 수 없는 엄숙한 문제다. 평화가 싫은 사람이 있을까. 인명의 살상을 초래하는 전쟁을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누가 좋아할 수 있겠나. 그런데 평화와 생명에 대한 사랑을 볼모로 잡아 불장난을 일으킨 망나니 지도자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전화에 몸서리쳤던 유럽은 평화를 희구했다.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은 유럽의 평화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 내용 중에는 라인란트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군의 철수가 담겨 있었다. 협상의 주역이었던 영·불·독 3국 지도자들은 그 공로로 이듬해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들은 무력에 의한 강압보다는 협상과 양보가 평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믿었고, 전쟁에 지친 유럽인들도 환호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1930년 라인란트로부터 철군을 마쳤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히틀러는 비슷한 수준의 양식과 선의를 가진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1936년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킴으로써 유럽의 평화 체제를 흔들기 시작했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강제 병합했고, 이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체코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앞서 로카르노 조약 체결 시 영국 외상이었던 오스틴 체임벌린의 동생)은 뮌헨까지 날아가서 히틀러를 만나 주데텐 지역을 독일에 넘기는 뮌헨협정(1938년 9월)을 체결했다. 그는 당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강대국과 대결하고 있는 작은 나라(체코슬로바키아)에 동정하지만, 동정한다고 해서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 나는 내 영혼 깊숙한 곳까지 평화를 사랑한다. 국가 간 무력 충돌은 나에게는 악몽이다."

그는 외교로 전쟁을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대가도 그 대가의 이행을 보장하는 장치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어준 양보는 결국 히틀러의 모험을 통제하지 못했다. 1년 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결과 5800만명 넘는 사상자를 냈다. 역사는 체임벌린이 추진하고 서명한 1938년 뮌헨협정을 유화정책(Appeasement)의 표본으로, 실패한 협상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여기서 교훈은 전쟁은 싫지만 그 전쟁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는 방법의 문제다. 무력 사용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사전에 배제하고 나면 결국 전쟁을 막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촌의 많은 나라가 평화 애호국임을 천명하고 자처하면서도 평시에 아까운 재정을 투입해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적대국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가 취할 정책으로서 Containment(봉쇄·압박) 또는 Engagement(협력·대화)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일지에 대한 논쟁은 국제정치학의 오래된 과제다. 현실적으로 이 두 정책은 상대편의 대응 여하에 따라 혼합되어 구사될 수밖에 없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 25년간 우리 역대 정부가 취해온 정책도 형용사만 조금씩 다를 뿐 채찍 또는 당근의 혼합으로 이어져 왔다. 그런데 왜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이렇게까지 악화돼버렸을까. 협력과 대화가 실패했을 때 실효적 압박과 봉쇄를 하지 못한 일이 되풀이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허울뿐인 엄포성 압박은 협력정책에서도 효과를 담보할 수 없고, 대가로서 안전장치를 확보하지 못한 채 상대의 선의에만 매달리는 달래기(Appeasement)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김종훈 전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