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걸음

[이구순의 느린 걸음] 통신품질평가와 연말 보도블록 공사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2.27 17:03

수정 2017.12.27 17:03

[이구순의 느린 걸음] 통신품질평가와 연말 보도블록 공사

요즘은 덜한 편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방자치단체별로 초겨울이 되면 보도블록 교체공사를 하느라 혈안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일도 많았다. 알고 보니 멀쩡한 보도블록이라도 일단 교체공사를 해 예산을 소진해야 다음해 예산을 다시 배정받을 수 있으니 당장 급하지 않아도 공사는 해둬야 하는 서글픈 속사정이 있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통신품질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기자 시절 통신품질평가 결과는 대표적인 '복사형' 기사였다. 지난해 썼던 기사를 복사해 붙인 뒤 날짜와 수치 몇 개만 바꿔 다시 써먹어도 되는 새로울 것 없는 기사라는 말이다.


1999년 도입된 통신품질평가는 통신회사들의 설비투자 경쟁을 유도하고 소비자가 더 나은 품질의 통신회사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게 목적이다. 통신품질평가 도입 초기에는 대단한 성과를 냈다. 소비자는 정부의 공식정보를 기반으로 통화가 더 잘되는 이동통신회사나 속도가 조금이라도 빠른 초고속인터넷회사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2017년에도 그 성과가 유효한지 따져볼 일이다.

대한민국의 통신 인프라는 자타공인 세계 최고다. 더 이상 정부가 품질평가를 통해 설비투자 경쟁을 촉발할 이유가 없다. 정부도 알고, 통신회사도 알고, 소비자도 아는 일이다.

소비자에게 통신회사 선택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목표라면 서비스별로 세세하게 모든 평가 결과를 공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난해 서비스별 평가의 평균치만 발표해 빈축을 사더니 올해는 과기정통부가 발표하고 싶은 항목만 추려내서 발표한 모양새다. 결국 소비자용 정보로서도 신뢰를 잃었다.

통신품질평가 결과 발표 후 남은 것은 통신회사마다 자기 회사에 유리한 평가항목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한 뒤 언론을 내세워 싸움박질하는 것뿐이다.

얼마 전 자율주행차 기술을 개발하는 한 대학 연구팀의 지도교수를 술자리에서 만났다. 학교 예산으로는 연구가 어려워 정부 연구예산을 지원받기 위해 1년이 넘도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등 관련 부처들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단다. 1년여 만에 1억5000만원가량 연구비를 지원받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연구원들이 연구할 시간에 공무원 찾아다니느라 들인 시간과 정부용 보고서 만드느라 쏟은 노력을 합치면 족히 15억원은 될 것"이라며 허탈한 표정으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해마다 통신품질을 평가하는 데 드는 예산이 10억원가량 된다고 한다. 정부 예산 10억원이 통신회사 홍보팀의 언론플레이 소재에 들어간다고 잘라 말하면 공무원들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내년 과기정통부 예산 중 클라우드 컴퓨팅 육성예산이 10억원이다.
자율주행차 연구팀 6개는 더 지원할 수 있는 금액이 10억원이다.

정부 예산 10억원의 가치와 시급성을 다시 따져줬으면 한다.
과기정통부 공무원들이 연말 보도블록 뒤엎기 공사를 하듯 통신품질 평가사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고민해줬으면 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디지털뉴스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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