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사설]

무술통공에 하얀 스케이트, 말은 좋지만

'혁명적' 규제혁신은 안보여.. 정부 빠지고 민간에 맡겨야

정부가 혁신성장에 풀무질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를 비롯한 6개 부처는 24일 이낙연 총리에게 '4차 산업혁명과 혁신성장'을 보고했다. 지난 22일엔 문재인 대통령이 규제혁신 토론회를 주재했다. 총리 보고는 청와대 토론회를 뒷받침하는 후속대책 성격이 짙다.

정부 신년보고도 혁신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기재부 보고서가 그렇다. 맨 앞장에 만화가 그려져 있다. 이정문 화백이 1965년에 2000년대의 생활상을 그린 미래만화다. 전기자동차와 태양열을 이용한 집이 보인다. 기재부는 '미친 생각?'이란 제목을 달았다. 당시엔 미친 생각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현실이 됐다는 뜻이다. 기재부는 또 '하얀 스케이트' 사진도 실었다. 노르웨이 출신 소냐 헤니(1912~1969년)라는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관행이던 까만 스케이트와 긴 치마 대신 하얀 스케이트와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습이다. 헤니는 올림픽 3연패, 세계선수권 10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하얀 스케이트' 사진에서 기재부의 혁신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금융위원회는 무술통공(戊戌通共)을 혁신 화두로 삼았다. 약 230년 전 정조가 편 개혁정책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본떴다. 사농공상 서열이 지배하던 때 신해통공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당시엔 시전(市廛) 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했다. 카르텔 밖의 다른 상인이 점포를 차리면 때리고 쫓아냈다. 정부가 그런 권한을 줬다. 이를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한다. 정조가 이를 뒤집어 누구나 시전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했다. 기득권을 뛰어넘은 혁명적 발상이다. 이는 조선 후기 상업자본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당시 집권세력은 시전 상인들의 뒷배 노릇을 했다. 정조는 고질적인 정경유착에도 칼을 댄 셈이다.

무술통공과 하얀 스케이트 발상은 참신해서 좋다. 문제는 실천이다. 문 대통령은 "혁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요란한 다짐과 달리 혁명적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수도권 입지 규제를 어떻게 풀지, 낡은 은산분리 규정을 언제 폐기할지에 대해선 입을 꼭 다물었다. 이래서야 말의 성찬에 그칠 것이란 우려를 지우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정부가 나열한 정책 리스트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정부가 거창한 목표를 세울수록 민간이 설 자리가 줄기 때문이다. 그것도 재탕, 삼탕이 수두룩하다.
앞으로 혁신 보고서는 정부가 앞장서서 뭘 하겠다가 아니라 민간에 맡기고 정부는 뒤에서 지원한다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얼마 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금융관료를 3분의 1로 줄이면 금융산업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관료들은 이 말을 곱씹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