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차장칼럼] 가상화폐를 다루는 금융당국의 속내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1.29 17:14

수정 2018.01.29 17:14

[차장칼럼] 가상화폐를 다루는 금융당국의 속내

얼마 전 학교 동기들과 신년회 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그 자리에는 일반기업, 공무원, 병원 등등 다양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대부분 팀장이나 부서장 언저리에 올라 있었는데, 그날의 안줏거리는 '회사 임원'이었다.

언론사는 일반기업과 분위기가 좀 다르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얘기가 나올 때마다 서로 무릎을 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탄식을 터뜨리기 바빴다.

그날의 얘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임원들은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는 슬그머니 빠진다는 것이다. 한 달을 고생한 프로젝트를 취소시킬 때나, 인사상 불이익을 줘야 할 때, 사내행사 참여를 독려할 때 등 직원들에게 불편한 얘기를 할 때는 팀장이나 부장급에게 시킨다는 것. 욕먹는 일을 자신들이 하고 나면 임원은 뒤늦게 나타나서 "고생들 많은데 회식이나 해"라며 어차피 본인 돈도 아닌 법인카드를 폼나게 내미는 좋은 역할만 맡는다는 것이다.


조직에서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줘야 한다. 성과지표로 얘기하는 기업에서 좋은 상사, 좋은 선배 노릇만 하기는 힘들다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악역은 욕을 먹지만 사실 그만큼의 책임을 지는 역할이다. 일이 잘못됐을 때는 가루가 될 때까지 온몸으로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악역에서 멀어지려는 것은 그런 책임을 피하려는 속내도 있을 것이다.

요즘 가상화폐 투자자 사이에서는 30일 실명제 실시가 단연 화두다. 정부가 약속한 대로 실명제가 실시되면 신규 가입자가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지금 가상화폐 가격은 작년 12월과 비교해 반토막을 넘어 세토막난 지경이다.

금융위는 실명제 실시 이후 가상화폐 거래소에 대한 신규 가상계좌 발급은 은행 자율이라고 말했다. 이게 공식 코멘트다. 그런데 사실은 그 뒤에 '은행들이 자신이 있으면 신규 발급하라'라는 부연설명을 곁들였다. 투자자들은 금융당국 말을 듣고 환호했지만, 은행들은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과거에도 그랬다. 뚜렷한 규정은 없지만 무엇인가 못하게 해야 할 때 금융당국은 자율에 맡긴다면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행이나 증권사들은 그때마다 그 미소에 숨은 진짜 의미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시행해 왔다.

지난해 증권사들이 비트코인 선물투자에 대한 설명회를 준비하다 돌연 접은 일이 있다. 당국에서 제도권 금융사들이 가상화폐를 기웃거리는 것을 걱정스러워 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됐기 때문이다. 몇몇 증권사가 눈치 없이 공문으로 정식 요청해 달라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꼬리를 내렸다.

가상화폐 시장은 싫든 좋든 금융당국이 관할해야 하는 상황이다.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앞에서 당당히 얘기해야 투자자들이 마음을 정할 수 있다. 과정이야 어떻든 금융당국의 목적은 투자자 보호다.
악역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낫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증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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