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로]

은사님의 시집

얼마 전 퇴근해보니 시집이 한 권 배달돼 있었다. 올해 여든을 넘긴 대학 시절 은사님이 두 번째 펴낸 것이다. 등단시인도 아니거니와 시의 형식을 지키지도 못해 시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는 게 은사님의 말씀이다.

첫장부터 읽어내려가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당신이 헤쳐온 파란의 세월과 일상을 담담히 풀어내는 문장 하나하나에 형형하되 그윽한 당신의 눈빛이 들어 있었다. 엄혹한 시대 상황을 피하지 않아 제적, 해직, 투옥 등 고초를 겪었던 탓일까. 늘 제자와 주변 사람들이 다칠세라 노심초사하던 마음 씀이 새삼스럽게 아파왔다.

험한 시절의 이야기,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소한 일상, 살며 일하고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둘러본 이곳저곳의 역사와 유적을 때로는 날 선 듯이, 때로는 무심하게 읊조렸다. 간단치 않은 당신 삶의 흔적이 오롯이 담겨 있다. 각각의 주제를 관통하는 화두는 시집 제목처럼 아름다운 인생이다.

소주 한 잔만 마시면 얼굴이 붉게 물드는 당신은 삶의 길을 묻는 젊은 제자들에게 '청명(淸明)에 죽으나 한식(寒食)에 죽으나 하루 상관'이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후회하지 않도록 치열하게 살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어려움을 겪는 제자에게 더러는 손편지로, 더러는 대폿집 대화를 통해 어깨를 두드려줬다. 당신을 기억하는 제자들 가슴마다 한 조각씩의 애잔한 추억이 있고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일 테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흐름이 뚜렷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도발과 같은 위협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남북 화해의 목소리가 높다. 한편에서는 남남갈등이 격화하고, 전 정권과 현 정권 간 살벌한 말싸움이 난무한다. 분노와 적개심이 넘친다. 사람에 대한 예의나 존중은 오간 데 없다. 정의는 비타협적이고 독점하는 것인 양 기세가 등등하다. 여기에다 검찰의 칼은 날카롭다. 과거 포승줄의 당신을 조사했던 공안검사를 미워하기는커녕 앞날을 축복하며 그립기까지 하다는 넉넉한 마음, 상대방을 배려하고 헤아리는 여유는 찾기 어렵다.

내 가슴에 여전히 푸른 모습으로 있는 노(老)은사님은 오늘도 세파에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위로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부도, 한 시대를 휘두르는 권력도 때로는 아침이슬이려니. 가난하여 가진 것 없다고 한숨질 일도 아니다'고.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더 건강하거라. 더 빛나거라. 더 헌신하고 베풀거라. 사랑하거라'고 울림을 준다.

30여년이 흘러 다시 삶의 길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마 그때와 마찬가지로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하루 상관이라고 하실 것 같다. 삿되지 않는 정의, 편 가르기가 아니라 포용하며 함께 가는 겸손한 민주주의, 경청하면서 잘못을 고치는 열린 사고가 그 속에 녹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두영 사회부장·부국장
doo@fnnews.com 이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