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나는 ET의 친구다

내가 아는 유명한 화가는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인천공항에 내리면 댁으로 직행하지 않는다. 오해하진 마시라. 가보지 못한 국내 이곳저곳을 한 이틀 더 돌아다니다가 댁으로 들어가신다. 어느 날 저녁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지구로 여행 온 존재, 보따리 싼 김에 한국도 며칠 구경하다 들어가는 거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지구로 여행 왔던 ET가 생각났고, 그날 밤 영화 를 다시 봤다. 1984년 처음 봤을 때보다 이야기는 더 재미있었고 더 감동적이었다. 경찰에 쫓겨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던 소년과 ET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가히 기상천외다. ET는 동료들과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로 여행 왔다가 낙오자가 되었다. 홀로 된 ET가 헛간에 숨어 있다가 그 집 소년을 마주치는 순간 영화관에선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우리가 만난 최초의 외계인은 너무나 흉측했다. 생긴 꼴도 걷는 모양새도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소년은 이 못생긴 생명체를 지켜주려 용감무쌍하게 나서고 마침내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돕는다. 영화가 끝날 무렵 ET는 흉측한 존재에서 왠지 그리운 존재로 재탄생된다.

그 시절 ET는 전 세계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형으로 등극했다. 멋진 영화 한편이 만들어낸 놀라운 위력이다. 좋은 영화는 관객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제공한다. 최고의 영화는 대중에게 즐거운 충격과 함께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제공하고, 우리네 삶과 존재에 대한 창조적 가치 확장을 성취하게 해준다. ET야말로 바로 그런 작품이다. 나는 영화를 다시 보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소년이 ET를 고향으로 떠나보내는 장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나 역시 이곳으로 여행 온 존재이고 언젠간 돌아가야 되는구나. 그런데 영영 떠나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구나!' 지금 내 책상 옆엔 좌우명 하나가 붙어있다. '나는 지구로 여행 왔다!'

돌이켜보니 몇십년 전 나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한반도 어느 시골집에 착륙했고, 내 지구여행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생활과 여행에 차이가 있다면 여행길엔 호기심과 탐험심의 세포가 곤두서서 길을 가면서도 두 눈은 두리번거린다. 다시 영화를 본 후부터 나는 여행길이라 생각하며 집을 나서고 마주치는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ET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동료들을 모아 놓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 했을 것이다.
자신이 지구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서, 또 지구소년과의 우정에 대해서. 나 역시 언젠가 돌아갈 곳이 있고, 그곳의 내 동료들도 내 여행담을 듣고 싶어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이야기보따리를 채우려 탐험심으로 무장하고 열심히 지구를 돌아다닐 생각이다. 아쉬운 건 30년 전 내가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오늘의 깨달음을 얻었더라면, 지금 내 책상 위엔 '지구여행기' 10권이 탑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이응진 한국드라마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