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로]

어느 모래언덕 길

수년 전 일본 도쿄 출장에서 만난 재일동포 사업가는 혼슈 남서부 돗토리현 출신이었다. 돗토리 일대는 지리상 우리 동해와 접한 곳인데, 그에 따르면 이 지역에 가볼만한 한적한 소도시가 한둘이 아니었다. 일본 요괴만화 거장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 캐릭터가 길거리에 나뒹군다는 사카이미나토, 인기만화 '명탐정 코난'으로 유명하긴 하나 버스 한대 안 다니는 '코난마을(유라)' 같은 곳이 끌렸다. 바다를 바라보는 광활한 사막의 존재도 머릿속에 남았다. 이 돗토리현을 겨울여행지로 골랐던 건 인천~요나고행 저렴한 항공권을 우연히 발견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열한살 아들과 갖는 오붓한 4박5일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나는 시게루, 코난 만화를 탐독하며 속성 공부를 했다. 돗토리 사구(砂丘)에 대한 경험자들 칭송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하라 사막도 가봤다는 어떤 이가 "감히 사하라를 뛰어넘는 곳"이라고 극찬한 글을 보고선 남편의 핀잔을 뒤로하고 아들과 두 손 들어 만세를 불렀다.

대망의 돗토리 사구 일정은 귀국 전 마지막날에 배정했다. 그전 요괴마을, 코난마을을 돌며 나는 틈날 때마다 아들에게 진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숙제를 빨리하는 아이가 되어야지" 등.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돗토리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 사구회관에서 내린 뒤 신발을 장화로 갈아신고 드디어 도착. 이제 곧 세상 묵은 때를 한방에 날릴 거대한 사막이 눈앞에 펼쳐지리라. 하지만 기대감이 무너진 건 금방이었다. '광활함'이 생각보다 부족했다. 저 멀리 굉장한 높이의 모래언덕이 그나마 위로가 됐다. '진짜는 저 언덕 꼭대기에 있을 거야.'

아들은 완만한 통행로를 제쳐두고 이미 가파른 경사길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뒤따르며 나는 외쳤다. "끝까지 올라가. 안 위험해. 전부 모래야. 미끄러져도 안 다쳐." 한참을 올랐을까. 숨이 찼다. 뒤를 봤다. 그제서야 절벽 같은 모래산 한복판에 내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미 정상 부근인 아들은 "포기란 없다"를 외치며 마지막 힘을 내고 있었다. 문제는 나였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갑작스러운 후회로 갈길을 잃었다. 꼭대기 아들이 목청껏 외쳤다. "엄마, 힘내. 포기하지말고." 나야 진실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으나 내려가는 게 더 무서워 달리 방법이 없는 걸 뭐.

천신만고 끝에 밟은 정상에서 발 아래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봤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대단한 반전은 아니었고, 그저 익숙한 감동이었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오른 고난의 모래언덕을 다시 봤다.
저 길 위에서 웃는 사람이 진짜 승자였구나. 아들은 어느 새 그 길을 새로 도전하겠다고 엉덩이로 언덕을 내려가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가 스승이다. 다시 오르는 아들을 향해 나는 힘차게 응원을 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