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차라리 CEO 임기를 대통령과 맞춰주세요"

"2008년, 2013년 기사들을 모아둬라. 사람 이름만 바꾸면 급할 때 기사 몇 개는 단번에 쓸 수 있다." 작년 말 IT 취재기자들에게 귀띔했었다. 나도 그 시절 썼던 칼럼들을 찾아뒀다. 찾아 둔 칼럼을 꺼낼 일 없기 바라지만, 요 며칠 새 내 노트북에는 매일 그 칼럼들이 펼쳐진다.

이번이 세 번째다. 비슷한 안타까움과 불안을 갖게 되는 것이….

2007년 말 대통령 선거를 마친 뒤 2008년 KT 최고경영자(CEO)의 비리가 슬금슬금 언론을 타기 시작하더니 결국 검찰이 나섰다. 2009년 초 KT CEO가 교체됐다. 2012년 말 대선을 치르고 2013년에도 같은 순서로 일이 벌어졌고, 2014년 새 CEO가 취임했다. 요즘 갑자기 KT CEO가 자주 언론에 등장해 닮은꼴 아닌가 불안하다.

KT 내부에서는 "큰 문제 아니다"라고 단속하지만, 외부에서는 벌써 10명 가까운 CEO 후보군의 실명까지 돈다. 현직 CEO는 이미 상처를 입고 있다.

사실 KT의 CEO 선임이나 연임 결정이 불공정 게임이긴 하다. 새 CEO를 찾을 때는 새로운 사람에 찬성표를 줄 만한 인사들로 사외이사를 바꿔두고, 이들이 CEO추천위원회 멤버가 되도록 한다. 미리 작전을 짜는 셈이다.

연임 결정은 더하다. CEO가 임명한 사외이사들이 CEO추천위원회를 구성하니 결국 '셀프 연임'인 셈이다. 호사가들은 KT CEO 선임은 대선 직후 정권을 잡은 세력의 입맛에 맞춰, 연임은 CEO의 계산에 따라 진행된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한다.

그러나 주식회사의 모양새를 갖춘 기업에서 사외이사들에게 중대 결정을 맡기는 것보다 더 투명해 보이는 구조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KT CEO 선임.연임 문제는 제도의 잘잘못을 따질 일은 아니다.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얼마나 덜 섞느냐를 따지는 게 본질일 게다.

사실 정작 안타까운 문제는 CEO 바뀌는 자체가 아니다. 세 번째 CEO 혼란을 겪으면서 KT의 생체시계가 대선시계와 맞춰지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이 바뀌고 나면 유독 정치권이나 수사기관으로 날아드는 CEO 고발형 내부투서가 늘어난다고 한다. 신사업 개발이나 사업실적을 챙기는 임원들 손이 느려진다고 한다. 이미 세계 최초 5세대(5G) 서비스, 세계에 내놓을 신산업 개발 같은 주제는 KT의 연구 대상도 아니라는 소문까지 있다.


결국 KT가 대통령의 임기와 CEO 임기를 맞춰놓고 '5년 단임형' 사업조직이 돼가고 있는 것 아닌가 안타깝다. 그 KT가 한국 최고의 통신인프라 기업, 혁신 주도형 IT기업이라는 브랜드를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차라리 CEO의 임기를 대통령 임기와 맞춰주면 조직이라도 유지될 것"이라는 KT 내부의 자조를 반복하지 않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디지털뉴스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