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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동네북된 美총기협회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02 14:13

수정 2018.03.02 14:13

규제 목소리 갈수록 확산
(뉴파운드랜드<美펜실베이니아주> AP=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뉴파운드랜드에 있는 '세계평화·통일 생추어리' 교회에서 열린 합동결혼 축복 예배에 한 여성 신도(앞줄 오른쪽)가 왕관을 쓴 채 총알이 없는 빈 자동소총을 들고 참석해 논란을 일으켰다.
(뉴파운드랜드<美펜실베이니아주> AP=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뉴파운드랜드에 있는 '세계평화·통일 생추어리' 교회에서 열린 합동결혼 축복 예배에 한 여성 신도(앞줄 오른쪽)가 왕관을 쓴 채 총알이 없는 빈 자동소총을 들고 참석해 논란을 일으켰다.
【워싱턴=장도선 특파원】 미국 총기 소지자들을 대표하는 전미총기협회(NRA)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단체다. 학교, 교회, 극장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NRA도 거의 빠지지 않고 비난을 받는다. 총기 소지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2조를 앞세워 모든 형태의 총기 규제 노력을 저지해온 주역이기 때문이다.

NRA 본부는 워싱턴에서 멀지 않은 버지니아 페어팩스에 위치해 있다.
기자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거리다. 회원은 약 500만명으로 미국 전체 총기 소지자의 5%를 차지한다. NRA 회원들의 조직에 대한 충성도와 결속력은 매우 강력하며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 정치인들이 NRA와 유대인들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말은 결코 근거 없는 게 아니다. NRA는 선거때 정치인들에게 돈만 대주고 뒤에서 지켜보는 소극적 단체가 아니다. 이들은 지지 후보를 당선시키고 반대하는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예산을 집행하며 적극적인 캠페인을 전개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선 힐러리 클린턴의 낙선을 위해 2000만달러를 지출했고 도널드 트럼프를 당선시키기 위해 1100만달러를 사용했다.

정치인들을 상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NRA가 지금 동네북 신세가 됐다. 얼마 전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로 17명의 학생과 교사들이 무참히 살해당한 비극적 사건을 계기로 NRA를 향한 미국 사회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친구들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이 학교 학생들은 정치인들에게 몰려가 그들의 면전에서 NRA와의 유착을 거침 없이 비난했다. 또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앞으로 NRA로부터 기부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라고 압박했다.

NRA와 사업상 연계돼 있던 기업들도 서둘러 관계 정리에 나섰다. 항공사 델타와 유나이티드 콘티넨탈, 렌터카 업체인 에이비스·허츠·버짓, 호텔 체인 베스트 웨스턴과 윈담 등이 지난주 NRA 회원들에 대한 할인 혜택 중단을 발표했다. 보험사 메트라이프와 퍼스트 내셔널 뱅크 오브 오마하도 NRA와의 제휴 관계 청산 계획을 밝혔다. NRA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트럼프 대통령 마저 일부 총기 규제 조치들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달 28일에는 NRA에 더욱 뼈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최대 스포츠 용품 판매업체 가운데 하나인 ‘딕스’ 스포팅 구즈가 플로리다 고등학교 총기 난사에 사용된 AR-15와 같은 공격용 총기 판매를 중단하고 기타 총기도 21세 이상 소비자에게만 판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현재 총기 구입 가능 연령은 18세다. 에드워드 스택 딕스 최고경영자는 또 정치권이 상식적인 총기 개혁을 단행하고 공격용 무기 판매 금지 법률을 제정해달라고 촉구했다. 같은 날 미국 최대 총기 판매망인 월마트도 21세 이하에게는 총기와 탄약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총기 구입 연령의 인상과 공격용 무기 판매 제한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텨온 NRA였지만 사회적 책임을 앞세운 기업들의 결정에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NRA와 골수 지지자들은 NRA와의 관계를 단절한 기업들이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급속 확산되는 총기 규제 캠페인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2013년 콜로라도 주 상원 의장으로서 총기 규제법 제정에 관여했던 존 모스는 NRA가 후원한 소환 캠페인 때문에 의원직을 상실한 뒤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총기 규제에 무관심한 미국 사회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 바 있다. 그는 “NRA가 (투표장으로) 불러 모으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에 동조해온 사람들이다. 지금 미국의 총기 정책이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나머지 미국인들이 너무나 태만하기 때문이다”라고 한탄했다.

미국 사회는 분명 2013년과는 달라졌다.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NRA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됐다고 판단하거나 총기 규제가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시기상조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래도 이번 만큼은 합리적 총기 규제를 향한 하나의 초석이 놓아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jdsmh@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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