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왜 우리 딸아이는 출석번호가 뒷번호인거죠?"

구자윤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14 16:13

수정 2018.03.14 16:13

[fn스포트라이트-일상 속 성차별] (1)
한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1학년 학생이 엄마 품에 안기고 있다. 최근 많은 학부모들은 딸 아이 출석번호가 뒷번호부터 시작되는 것은 성차별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며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하기도 한다. 연합뉴스
한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1학년 학생이 엄마 품에 안기고 있다. 최근 많은 학부모들은 딸 아이 출석번호가 뒷번호부터 시작되는 것은 성차별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며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하기도 한다. 연합뉴스

# 최근 사회 각계 각층에서 미투(MeToo, 나도 말한다) 운동이 확산되는 것은 그동안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억눌렸던 분노가 서지현 검사의 상급자에 의한 성추행 폭로 및 변화된 사회문화 등을 계기로 급속히 분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지금까지 이같은 폭로가 수면으로 올라오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성 중심적 성차별 문화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파이낸셜뉴스는 일상 속의 성차별 실태 및 개선책 등을 짚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한다.

직장인 전기환씨(가명)는 평소 딸에게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성차별이 점차 줄어들고 딸만큼은 남녀가 평등한 세상에서 살게 해주고 싶다는 희망의 격려였다. 그런 전씨는 딸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딸아이가 여자라는 이유로 출석번호 51번을 배정받은 것이다. 남자 아이들은 출석번호가 1번부터 시작하는 반면 딸을 포함한 여자 아이들은 51번부터였다. 전씨는 자신의 교육 철학과 현실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가졌다고 털어놨다.

■인권위 권고에도 안 바뀌는 출석번호
이 같은 감정을 느낀 학부모는 전씨만이 아니다. 이모씨도 딸 아이 입학식에 가보니 여자 아이들 출석번호가 50번대부터였다. 이씨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여자애는 반장이나 전교 회장이 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여자는 뒷번호의 아이들, 이등시민이란 의식과 함께 나서면 안 된다는 억압을 내면화한다”며 “지금도 출석번호가 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막혔고 내 아이가 그렇게 자라는게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출석번호가 남자는 1번부터, 여자는 51번부터 시작하는 게 왜 성차별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05년 이를 성차별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인권위는 “여학생에게 뒷번호를 부여하는 관행은 어린 시절부터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한다는 차별적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할 수 있고 남학생에게는 적극적 자세를, 여학생에게는 소극적 자세를 갖게 할 수 있다”며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출석부 번호를 부여할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도 10여년이 지난 현재 여전히 상당수 학교에서 여학생에게 뒷번호를 배정하고 있다. 학부모 민원으로 시정된 사례도 있다. 박모씨는 서울시교육청에 출석번호와 관련된 민원을 제기해 딸 학년인 1학년의 출석번호가 성명의 가나다순으로 바뀌었으나 나머지 학년은 변화가 없다고 한다.

교육부 관계자는 “최근 학교 현황을 살펴본 결과 한 해는 남자가 1번, 이듬해는 여자가 1번 등 격년제로 출석번호를 정하는 학교가 있고 가나다순, 생년월일순으로 하는 학교도 있으나 여자를 뒷번호에 배정하는 학교가 여전히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며 “다만 무조건 여자를 1번으로 하라는 것은 역차별 소지가 있는데다 특히 학교에 대한 장학지도 권한은 각 시도 교육청에 있어 이런 부분을 국가가 개입, 명령할 사안인지 검토해봐야 하고 지침보다는 인식 개선이 필요한 것 같다”고 밝혔다.

통합교과 교과서 1학년 '가을'권 34쪽에서는 여성이 집안일을 전담하는 것처럼 표현됐다.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특정 성에 대한 편견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국가인권위원회 제공)
통합교과 교과서 1학년 '가을'권 34쪽에서는 여성이 집안일을 전담하는 것처럼 표현됐다.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특정 성에 대한 편견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국가인권위원회 제공)

■"남성은 생산, 여성은 소비"..교과서도 성차별
출석번호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 인권위는 지난해부터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는 초등학교 1~2학년 교과서 15종을 분석한 결과, 과거보다는 개선됐으나 여전히 성 역할에 고정관념이나 특정성에 대한 편견을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내용의 ‘2017년도 초·중등 교과서 모니터링’ 보고서를 발표했다.

실제 교과서에서는 여성이 집안일을 전담하는 모습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사회 생활을 하는 인물은 대부분 남성이고 장바구니를 들고 쇼핑을 하는 인물은 대개 여성이어서 ‘소비하는 여성, 생산하는 남성’ 이미지를 조장한다는 지적이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바닥에 앉아있는 자세를 그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양반다리로, 할머니와 어머니는 무릎을 꿇는 자세로 있어 여성을 남성에 비해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교과서의 남녀 성비, 장애인, 다문화, 직업군 등을 다룬 인권 요소 분석표를 받고 인권위 보고서 등도 검토해 매년 교과서를 수정·보완하고 있다”며 “오는 17일 보고서 작성 교수와 함께 현장적합성 워크숍도 열고 3~4학년 2학기 교과서에 대한 분석도 의뢰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양성평등 교육을 연구하는 초등교사 모임인 ‘초등성평등연구회’는 매년 교과서 제작 뒤 평가하기보다 사전에 성차별적 부분은 없는지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제는 초등학교에서도 실질적인 성평등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초·중·고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20만명 이상이 참여해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답변을 내놨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교사들 생각이다.

초등성평등연구회 소속 교사 솔라(닉네임)는 “청와대에서 성평등교육을 몇 시간 하면 될 것처럼 답변했는데 오히려 성차별이 없는 것처럼 은폐하는 효과만 낳을 수 있다. 따라서 학교 행정, 제도, 과목 등 모든 면에서 인권 감수성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며 “학교는 관성적인 공간이어서 예전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려는 경향이 있어 교육부가 손을 놓고 있으면 예전 구조를 옹호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따라서 교육부에 성평등 전담 부서와 성평등 정책 담당관을 두고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스포트라이트팀 박인옥 팀장 박준형 구자윤 김규태 최용준 김유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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