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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해외 대기획 3탄]‘현금 실종’ 텅빈 ATM…"버스비 낼 돈 없어 출근도 못해요"

김유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15 17:06

수정 2018.03.15 21:41

[포퓰리즘의 비극 중남미를 가다]<1> 석유강국의 몰락, 베네수엘라
인플레로 볼리바르 가치 폭락..정부는 결국 화폐생산 중단
카드 안받는 대중교통 못 타..70% 더 얹어 현금 암거래도
지난달 28일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위치한 한 은행 ATM 앞에 현금을 찾기 위한 시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사진=김유아 기자
지난달 28일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위치한 한 은행 ATM 앞에 현금을 찾기 위한 시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사진=김유아 기자


【 카라카스(베네수엘라)=김유아 김문희 기자】 "마지막으로 현금을 찾은 게 거의 한달 전이에요. 현금자동인출기(ATM) 앞에 줄이 길게 서있는 날은 운이 좋은 날입니다. ATM에 현금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지난달 28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대표 중심지로 꼽히는 시몬 볼리바르 광장에서 만난 완베르 이베스씨(18)의 푸념이다.

카라카스 대표 중심지인 시몬 볼리바르 광장의 노점에는 'SI HAY PUNTO(카드단말기 있음)'이라는 플래카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정부가 카드 사용을 장려 해서가 아니라 베네수엘라 내의 '현금 실종' 현상 때문이다.
현금 구하기가 어려워진 베네수엘라에서는 팝콘이나 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길거리 노점에서조차 현금이 아닌 카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같은 날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중심가의 볼리바르 광장 노점의 팝콘 기계에 'SI HAY PUNTO(카드단말기 있음)'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사진=김유아 기자
같은 날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중심가의 볼리바르 광장 노점의 팝콘 기계에 'SI HAY PUNTO(카드단말기 있음)'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사진=김유아 기자


■초(超)인플레이션과 경제 악재로 현금 '실종'

4~5년 전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우스갯소리로 "커피 한잔을 마시려면 백팩이 필요하다"고 했다. 베네수엘라 화폐단위인 '볼리바르'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면서 커피 한잔을 사려면 '볼리바르' 돈다발을 들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 같은 농담도 사라졌다. 살인적인 물가상승과 이에 따른 화폐가치 폭락이 화폐생산 중단이라는 악재를 만들어서다. 이런 현상 때문에 베네수엘라 전체적으로 현금이 자취를 감추고 현재는 현금 구경도 하기 힘들어졌다.

현금이 부족한 탓에 카드 거래가 일반화됐지만 매일 카라카스 시내 곳곳의 ATM 앞은 현금을 뽑기 위해 줄지어 선 시민들로 북적인다. 버스나 택시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를 비롯해 매장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 현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카라카스시의 파르케 크리스탈 건물 내 위치한 바네스코 방코 유니버설 은행에도 현금을 찾기 위해 약 20명이 다닥다닥 줄지어 서 있었다. 바네스코 방코 유니버설 은행 직원은 "하이퍼인플레이션(초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서 고액이 아닌 화폐는 쓸모가 없어졌다"며 "지난해 12월 정부가 단위가 작은 화폐를 남미 한 지역에 보내 고액화폐로 재생산했다는 얘기도 돈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도 현금 부족 상황이 심각하지만 앞으로도 물가는 더 오르고 현금 부족 현상은 심화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인근 다른 은행지점 두 곳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ATM에 돈을 찾으러 왔다가 현금이 없어 텅 빈 ATM 앞에서 잔고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시민들도 여럿 보였다.

베네수엘라 화폐 5000볼리바르.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는 현금을 구경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사진=김유아 기자
베네수엘라 화폐 5000볼리바르.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는 현금을 구경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사진=김유아 기자

■'현금 매매'까지 등장

이날 버스를 기다리던 바네사 산체스씨는 매일 아침 7시부터 ATM 앞에 줄을 선다. 그는 이날 운좋게 7시간을 기다린 끝에 현금을 손에 쥐었지만 그가 손에 쥔 현금은 고작 1만 볼리바르 한장이 전부다.

정부가 허락한 하루 현금인출 최대한도인 1만 볼리바르는 달러로 환산하면 5센트에 불과하다.

바네사씨에게는 이 1만 볼리바르가 큰 의미가 없다. "하루 왕복 버스요금만 8000볼리바르인데 2000볼리바르만 남겨서 뭘 할 수 있겠느냐"며 한숨만 내쉬었다.

카라카스 내 버스 편도요금은 3000볼리바르지만 외곽지역에서 출발하는 버스 요금은 이보다 좀 더 높은 편이다. 그는 "버스비를 내지 못해서 아예 출근하지 않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베네수엘라의 '현금 품귀 현상'은 왜곡된 현금 암시장을 탄생시켰다. 원래 화폐 가치에 20~70%를 더 얹어 현금을 매매하는 암상인들까지 출몰하게 된 것이 대표적이다.

실제 바네사씨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은 "현금을 사거나 팔아봤다"고 증언했다.

후안 렙앨온씨는 "현금으로 계산했을 때 카드로 계산할 때보다 저렴하게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면서 "웃돈을 주고 현금을 사더라도 물건을 카드로 구매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베네수엘라 남성은 야채가게를 운영하며 이따금씩 받는 현금을 암시장에 내놓는다고 말했다.

그는 "통장이 없는 시골동네 주민이 현금을 쓰다 보니 한달에 5만 볼리바르가량 모인다"며 "40% 얹어서 판 지 두달째"라고 말했다.
그는 "나도 현금이 부족했던 때는 70%까지 주고 현금을 사 본 적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현상은 베네수엘라에 거주하는 현지 교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두달여 전 베네수엘라로 이사 온 한국인 안모씨는 "이 나라에서는 현금이 부족하니 대부분의 거래가 카드로 이뤄진다"며 "카드 발급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현지에 살고 있던 지인의 카드를 빌려 생활해야 했다"고 전했다.

kua@fnnews.com 김유아 김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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