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로]

불신이 부른 공직사회 녹취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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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윗선의 지시를 받으면 무조건 녹음부터 한다고 합니다."

최근 만난 박근혜정부 시절 고위직을 지냈던 한 인사의 푸념 섞인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정부 출범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공직사회의 한 단면이다. 트라우마였을까. 그의 말은 부당한 지시이거나 일상적 지시라도 무조건 '근거'를 남겨두는 행정적 습관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의역해보면 이렇게 해야 '뒤탈'이 없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탄핵 이후 수많은 공직자들이 부당한 지시를 하거나 지시를 이행한 혐의 등으로 사법당국의 수사 대상이 됐다. 그저 '까라면 까라는' 기존 수직적 구조로는 아무도 온전할 수 없다는 일종의 '본능적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일까.

온당한 지시나 부당한 지시 여부를 판단하기에 앞서 무조건 녹음하고 근거를 만들어놔야 적어도 안심이 되는 불신이 공직사회 도처에서 간접 확인되는 모양새다.

아마도 전 정부 비선실세인 최순실의 막대한 영향력이 녹아든 각종 부당한 지시를 온몸으로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이행했다가 경을 치렀던 '경험칙'이 반영된 자기방어일 게다. 공직사회만큼 근거를 좋아하는 조직은 없다. 어떤 행위든 문서화해놔야 직성이 풀린다. 나중에 감사 등에서 혹시 문제가 됐을 때 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한 원천 소스다. 그래도 녹음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다. 윗선의 지시가 떨어지면 지시를 이행하는 담당자 결재 순서대로 사인하거나 전결처리가 이뤄졌을 뿐 지시사항을 녹음하거나 별도의 근거를 상대방 모르게 남겨놓지는 않았다.

복잡한 행정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소재를 가리는 것은 쉽지 않다. 부당한 지시의 경우 특혜나 부조리 등이 얽혀 있어 비교적 탈·불법의 판단 범위가 선명하지만, '애매한' 지시의 경우 지시를 이행한 하급자가 소위 '독박쓰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물론 소신 있게 정책을 잘하려다 예산을 낭비해도 '구제되는' 시스템이 있긴 하다.

그러나 공직사회가 서로를 믿지 못해 일종의 '내용증명' 형식을 동원하는 것 자체가 개운치 않다. 아무리 상급자 지시라도 무조건 이행하기보다는 근거를 남겨둬 혹시 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겠다는 의도일 게다. 여기엔 서로에 대한 극심한 불신이 깔려 있다.

아예 복지부동하려는 분위기도 있다. 애매한 지시가 떨어질 경우 '대놓고' 못하겠다고 항명할 수도, 그렇다고 모른 척 따를 수도 없을 때 쓰는 '깔고 뭉개는' 전형적인 '세월아 네월아' 수법이다.
복잡한 행정행위에 대한 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해 상사의 지시를 녹음하는 일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불신 탓에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필요한 창조적 소신행위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히 안전지상주의는 민간조직에 비해 역동성이 다소 부족한 공직사회의 경직을 가져올 수 있다.

haeneni@fnnews.com 정인홍 기자 정인홍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