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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은행의 디지털 혁신과 '캐즘'

박하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19 16:54

수정 2018.03.19 16:54

[기자수첩] 은행의 디지털 혁신과 '캐즘'


2000년대 초의 일이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MD플레이어를 구입했다. 20여년 전 40만원에 육박했으니 학생 신분으로는 꽤 큰돈을 쓴 셈이다. 장점은 많았다. CD플레이어처럼 판이 튀지도 않았고, 음질은 CD 수준으로 좋았다. 하지만 MD플레이어는 곧 골칫거리가 됐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더 작고 편리한 MP3플레이어가 출시됐기 때문이다.

MP3플레이어는 따로 음반을 구입할 필요도 없었다. 파일은 온라인에서 쉽게 다운로드할 수 있었고, 좋아하는 음악만 골라 나만의 편집음반을 만들 수도 있었다. 결국 40만원짜리 호사는 3개월도 안 돼 서랍 속에 처박혔다. 이후 MD플레이어는 '캐즘(chasm)'을 극복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가 됐다.

캐즘은 새로 개발된 제품이 대중화되기 전 일시적으로 외면받는 현상을 말한다. 기업 컨설턴트인 제프리 무어가 최초로 사용한 말로 주로 첨단제품이 많이 출시되는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자주 쓰인다.

최근 금융권에서도 캐즘 현상이 보인다.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기 위해 모바일뱅킹, 디지털뱅킹 등 IT분야 개혁을 가속화하고 있지만 실제 소비자는 불편함, 나아가 거부감까지 느낀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소비패턴 분석, 생체인식, 챗봇 컨설팅 등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실제 사용자들의 반응은 은행들의 수고를 보상하지 못하고 있다.

고객의 바람은 소박하다. 당장 내가 쓰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이 다운되지 않고 원활하게 작동하길, 지금 진행하는 계좌이체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되길,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물어 알 수 있길 바란다. 나아가서는 내 형편에 맞는 적절한 대출 금리를 제공받고 힘들게 번 돈은 한푼이라도 이자를 더 받을 수 있길 바라는 것, 어찌 보면 고객의 바람은 은행의 기본적인 업무와 합치된다.

물론 은행들의 디지털 변환은 세계적인 추세다. 하지만 현재의 캐즘을 어떻게 극복할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더라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건 결국 그 안에 담긴 콘텐츠다. MD플레이어에서 MP3플레이어로, 다시 한번 스마트폰 속의 음악 앱으로 방식은 바뀌지만 즐겨 듣는 노래는 늘 비슷하다.
화려하게 포장된 디지털 혁신 속에서 고객들이 진짜로 원하는 서비스에 대한 고민은 놓치고 있는 게 아닌지 묻고 싶다.

wild@fnnews.com 박하나 기자 박하나 금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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