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fn 해외 대기획 3탄]몇십원에 피검사 받아도 약값은 한달 월급…毒이 된 무상의료

김유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22 17:06

수정 2018.03.22 17:40

[포퓰리즘의 비극 중남미를 가다]<3>베네수엘라-붕괴된 의료서비스
원가에도 못미치는 진료비..환자들 몰려 6시간 장사진
수입에 의존하는 약은 품귀..약값 1000% 뛰고 재고 없어
지난달 26일 카라카스 미란다지역 살룻 차카오병원 앞 야외 벤치에서 사람들이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김유아 기자
지난달 26일 카라카스 미란다지역 살룻 차카오병원 앞 야외 벤치에서 사람들이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김유아 기자


【 카라카스(베네수엘라)=김유아 김문희 기자】 '국내 병원 응급실 운영률 10%. 전국 약품 공급률 12%.' 베네수엘라 의사들이 말하는 베네수엘라 현주소다. 베네수엘라 야당 연합은 국립병원 104곳과 사립병원 33곳 의사를 상대로 진행한 조사를 통해 최근 이 같은 결과를 내놨다. 현 베네수엘라 정부는 의료 관련 통계를 아예 발표하지도 않고 있다.'베네수엘라식 무상 의료복지'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국민을 병들게 하고 있다.
석유에만 의존해 무상의료 정책을 시행하고선 지속가능한 방안을 내놓지 않은 까닭이다. 유가 하락과 외화 고갈이 베네수엘라를 덮치자 병원과 약국은 환자를 치료하지 못해 초토화됐다.

■전문의 없어 인턴이 진료

지난달 26일 살룻 차카오 병원 앞 벤치는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환자들은 뜨거운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꼼짝없이 누워있거나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아이를 보듬고 있던 부모들은 지친 표정으로 다음 순서를 안내하는 전자판만 연신 올려다 봤다. 환자들은 짧게는 2시간, 길게는 6시간 이상 이곳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9시부터 이곳을 찾은 안드레나 파라씨(34·여)는 아픈 5세 딸을 무릎에 누이고 여섯시간째 진단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오전에 지불한 딸의 혈액검사비는 1만볼리바르, 달러로 약 4센트(한화 약 42원)에 불과했다.

파라씨는 병원에서 하루 종일 기다릴 것을 감안해 직장 출근도 포기했지만 이 편이 차라리 낫다. 이날 하루 직장에서 버는 돈보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려 아끼는 병원비가 더 많아서다. 그는 "다른 병원에 가면 돈을 더 내야 하기 때문에 오래 기다려야 해도 일단 여기로 왔다"고 답했다.

카라카스 시장이 운영하는 이 병원은 원래 이 지역에서 살며 주민세를 내는 시민에게만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했지만 최근 모든 시민에게 개방됐다. 이후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찾아오는 시민 행렬이 이어지면서 오랜 대기시간은 일상화됐다. 로레나 마르티네스씨(40·여)는 "예전에는 5분이면 진료가 가능했는데 요즘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토로했다.

진료를 접수한 환자들은 대기실에서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정작 병원 내부는 썰렁했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간호조무사들은 접수대 인근에서 사담을 나누고 있었고, 일부 간호사는 환자가 없는 병동만 들락거렸다. 이 많은 환자들을 진료할 전문의는 없었다. 환자 테레지아 라모스씨(70·여)는 "진료를 접수할 당시 소아과 의사도 없고 실습생이 진료한다고 안내받았다"고 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상 진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던 셈이다.

지난달 26일 미란다지역 로카텔 약국에서 만난 곤잘레스씨가 보여준 처방전./사진=김유아 기자
지난달 26일 미란다지역 로카텔 약국에서 만난 곤잘레스씨가 보여준 처방전./사진=김유아 기자

■구할 수 있는 약도 없어

운 좋게 병원에서 진료받았더라도 약국에 가면 절망의 연속이다. 약이 없거나 너무 비싸서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같은 날 로카텔 약국. 시저 곤잘레스씨(25)는 딸의 처방전을 들고 약국 안을 휘젓고 다녔다. 두 살배기 딸이 화상을 입어 마음이 급했지만 네 시간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약을 구하지 못해서다.

항생제 등 약을 구하기 위해 오늘만 총 5군데 약국을 들렀지만 그의 손에는 칫솔 하나만 들려 있었다. 그는 "외곽에서 이곳 시내 중심까지 왔지만 약은커녕 기저귀도 못 구했다"며 "아프면 약을 먹고 나아야 하는데 아이도 우리도 약을 못 먹고 있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의 어깨 너머에 진열돼 있는 약품 대부분에는 최저임금 한 달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가격표가 붙여져 있었다.

약을 구하지 못하면 학부모끼리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물물교환을 하기도 한다. 약국에 들른 두 아이 아빠 호세 안토니오 곤잘레스씨(35)는 "학부모끼리 메신저 앱을 통해 각자 갖고 있는 약품 정보를 공유하다가 얼마 전 항생제를 겨우 구했다"고 털어놨다.


이 역시 베네수엘라 정부가 오일머니로 약품을 수입해 국내에는 훨씬 싼 가격으로 배포하는 등 지속가능하지 않은 포퓰리즘 보건정책을 고집한 결과다. 국내 제약기술 투자에는 소홀히 하고 수입약품을 배포만 하다가 외화가 바닥나자 현재는 약품수입 자체가 거의 끊겼다.


해당 약국 약사 호세 마르티네스씨(49)는 "예전에는 원재료를 수입해 품질 좋은 약들을 제조했지만 지금은 제약공장도 다 문을 닫았다"며 "사람들이 많이 찾는 혈압약이나 당뇨약도 못 본 지 오래됐고 그사이 약값도 1000% 올랐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kua@fnnews.com 김유아 김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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