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느린 성장의 미학

김태경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22 17:17

수정 2018.03.22 17:17

[데스크 칼럼]느린 성장의 미학


우리나라 과학 수준은 조선시대 세종 이후로 계속 추락하는 중이다. 장영실 이후 과학은 길이 끊겼고 상업에 대한 온전한 가치 평가도 지리멸렬했다. '국가체제'라고까지 표현하는 성리학은 모든 다양성과 창조성이 꽃필 수 있는 토양을 잠식했다. 상대적으로 철저한 명분론과 자기보전의 강화라는 역선택의 불량한 잔해들만 남았다. 국력을 강화할 모든 수단과 토대들이 없어져도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망국적 이데올로기가 꽃을 피웠다.

조선시대부터 전개돼온 '사족체제'라는 이너서클이 국가 운영의 중심축이 되면서 모든 가능성을 말살한 탓이다.
과학을 우습게 여기고 실용성을 부정하며 추상과 명분이 온 나라를 지배해온 결과다. 그래서 식민지도 겪어보고 이때 형성된 외세의존적 식민의식은 미국이라는 '대타자'를 발굴하며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주체없는 근대는 이런 것이다. 우리의 주체는 무엇일까. 조선시대에는 중국이, 지금은 미국이 그 역할에 충실하도록 우리의 뇌와 무의식은 그렇게 침윤당했다.

그렇지만 진정한 우리의 주체는 강박적 성장 이데올로기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라는 말은 21세기 신성불가침 조약이다. 더 이상 성장의 과실을 따먹을 수 없는 임계치에 도달해 있는 상황은 그래서 애써 무시한다.

세계적 자동차회사인 도요타의 CEO 도요다 아키오 는 "나무 하나가 너무 빨리 자라면 그 줄기의 나이테가 불안정해져서 나무가 약해진다"고 기존의 확장적 성장 정책을 비판했다. 도요타의 지나친 확장을 느린 성장이나 마이너스 성장보다 더 위험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한 템포 쉬어가는 안정적 성장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 70년 동안 자본주의의 최대 황금 기간에 기업은 순자산 가치 대비 이윤율이 줄곧 하락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지난 1970년 정점을 찍은 후 계속 하향 추세다.이윤을 추출하는 시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위기의식이 기업들로 하여금 디지털 경제로의 급속한 전환을 추동했다. 이윤 창출의 새로운 빛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디지털 경제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대기업의 독점적 플랫폼에 따른 새로운 독점화 현상만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모든 가치가 주식에 종속돼 있는 게 그것이다. 그 가치가 사회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산업주의 시대의 법제화된 독점은 우버와 아마존 등의 플랫폼 독점으로 다시 표현된다. 산업주의 시대 알고리즘은 그래서 계속 작동한다. 무한리필처럼 이윤이 계속 창출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이 이를 강화한다.

디지털 기업의 비밀주의가 독버섯처럼 양산되는 이유다. 개방성이 아닌 폐쇄성을 기반으로 한 기업운영체제가 활개치는 것도 그래서다. 보안이라는 이름으로. 대표적으로 소수가 만든 보안 프로그램은 오픈형 보안 솔루션에 비해 경쟁력이 취약하다. 비밀 보안 솔루션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테스트되기 때문이다.
보안 노출은 시간문제다. 계속 회사의 비밀을 유지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고객과 투자자들에게 회사가 과거의 혁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승패를 단박에 결정짓는 방식이 아닌 오래 게임을 즐기는 방식으로 바꾸면 어떨까. 똑똑한 비즈니스는 자기가 의존하는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는 법이다.

ktitk@fnnews.com 김태경 기자 김태경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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