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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슈퍼맨'의 아름다운 은퇴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23 17:11

수정 2018.03.23 17:11

[월드리포트] '슈퍼맨'의 아름다운 은퇴


홍콩의 억만장자인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이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장남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앞으로 선임고문 역할만 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68년간 해온 경영인으로서의 활동을 사실상 마감했다.

외신들은 그의 은퇴로 홍콩의 한 시대가 끝났다고 보도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배출된 많은 '타이쿤(tycoon)'으로도 불리는 홍콩의 1세대 창업자 중 대표 격으로 올해 90세가 되는 리가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했기 때문이다.

리는 후계자인 장남 빅터가 참석한 은퇴 기자회견에서 "지난 수년을 돌이켜볼 때 청쿵을 창업하고 사회에 기여한 것은 큰 명예였다"고 소감을 말했다.

리는 전쟁의 혼란 중이었던 1940년 당시 영국령인 홍콩에 난민으로 와 공장 바닥 청소일부터 시작해 플라스틱 조화 제조업체 창업을 시작으로 부동산, 유통, 정보기술(IT)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업으로 확장하면서 청쿵은 50개국에서 30여만명을 고용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에도 청쿵 계열의 한 드러그스토어 체인이 진출해 있다.


그는 거의 매일 하루 16시간씩 일하면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거래와 신속한 투자로 홍콩인들로부터 '슈퍼맨(超人)'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재산은 경제전문지 '포브스' 집계에서 353억달러(약 38조원)로 세계 부자 순위 23위에 올라 있다.

그럼에도 리 회장은 검소한 모습으로도 주목받았다. 1962년 구입한 주택에서 계속 살면서 스위스제 고급 시계가 아닌 50달러짜리 일제 시계를 오랫동안 차고 다녀 화제가 됐다. 일화로 차남 리처드가 여섯살일 때 리 회장은 자신이 앉을 비행기 1등석을 구경시켜준 뒤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이코노미석으로 보내면서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야만 1등석에 앉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리처드는 미국유학 시절 학비와 기본생활비, 방세만 아버지로부터 받고 용돈은 직접 벌어야 해 맥도날드 햄버거 계산원과 골프장 캐디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도 했다. 자신의 지프차가 고장났을 때는 자동차공학 수업에서 들은 내용을 토대로 직접 고치면서 옷이 기름 범벅이 되기도 했다.

홍콩에서 50년 가까이 산 지인에게 들은 얘기인데 골프광인 리 회장을 클럽하우스에서 자주 보지만 재벌인데도 매우 겸손하고 소탈하다며 주재원들로부터 골프화 끈까지 묶어주는 대접을 받는 한국에서 온 고위 인물들과는 대조적이라고 했다.

홍콩은 지난 1970년대 부패가 만연하자 당시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 총독이 부패 감시기구인 염정공서(廉政公署.ICAC)를 만들었다. 오래전 국내 모 방송에서 방영한 특집프로에서 염정공서 직원들은 부패혐의자를 영장 없이 체포해 48시간 구금할 권한을 갖고 있으며 일부 요원은 총기까지 휴대를 하는 것을 봤다.

아무리 대기업가라도 비리로 복역 후 경영에 복귀하는 것은 홍콩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리의 은퇴 발표를 보도한 홍콩의 영문 매체에는 존경을 뜻하는 단어 'admired'가 많이 눈에 띄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홍콩에서 열린 중국 반환 20주년 기념행사에서 리 회장과 악수할 때 10초 동안 손을 잡아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됐다.

홍콩 마담투소 밀랍인형박물관에 가보면 이소룡, 성룡과 같은 우리에게 낯익은 홍콩의 연예 스타들과 함께 실물 크기의 리카싱 인형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홍콩 사회에서의 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리는 앞으로 자신의 재단을 통해 교육과 의료후원 사업에 더 주력할 계획이다.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나오는 우리 재벌들을 생각하면 정직한 삶을 살고 존경을 받고 떠나는 기업인 리카싱의 은퇴가 아름답고, 부럽다.

jjyoon@fnnews.com 윤재준 기자 윤재준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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