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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아호 하나쯤 가져보자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26 17:02

수정 2018.03.26 18:14

[fn논단] 아호 하나쯤 가져보자

필자가 은행장으로 있을 당시 정초에 본점 연회장에서 경영진과 함께 휘호 행사를 한 바 있다. 임원 각자 맡고 있는 사업본부의 한 해 경영목표 달성 의지를 담은 사자성어와 아호를 쓰고 낙관으로 마무리하는 흔치 않은 이벤트였다.

먹을 갈면서 그 향도 느껴보고 오랜만에 붓으로 한자(漢字) 혹은 한글을 한지(韓紙)에 써보는 시간이었다. 붓글씨를 써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으며, 써봤다 하더라도 아주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서예가 두 분을 모시고 원 포인트 레슨을 받기도 했지만 모두들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 신선한 체험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행사를 기획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업목표 달성 각오를 마음에 새겨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아호를 하나씩 갖게 해주기 위함이다.

은퇴 후에도 임원 상호 간 호칭은 재직 시의 직급이나 직책을 부르게 될 터인데 아호를 부르는 것이 훨씬 인간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요즈음도 당시 경영진 간에는 자연스럽게 아호를 부르고 있다.

필자는 지인으로부터 '의산(義山)'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뫼 산' 자가 들어가는 호가 흔하긴 하지만 평범해서 더욱 좋다. 은행장 또는 은행장님 대신에 의산 또는 의산 선생이 듣기에도 편하고 서로 친근감이 더 든다.

본명(本名) 외에 또 다른 이름 즉, 호(號)를 가진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다. 그 사람의 생김새나 행동, 성격 등의 특징에 따라 남들이 지어 부르는 별명(別名)을 가진 사람도 많다. 문인, 학자, 화가 대부분은 필명(筆名), 예명(藝名)을 가진다. 특히 언론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 저명인사에게는 본인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애칭(愛稱)으로 자주 쓴다. DJ, YS, JP, MB 등 부르기 편하고 기억이 오래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김정희는 우리가 잘 아는 추사(秋史) 외에도 오백 개가 넘는 호를 가지고 이를 경우에 따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썼다고 한다.

아호(雅號)는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이다. 이를 흔히 호(號)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시(詩), 문(文), 서(書), 화(畵)의 작가들이 주로 사용하지만 일반인들도 가진 분이 많다.

호 또는 아호를 짓는 데는 나름 기준이 있다. 현재 살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장소를 참고로 하는 경우,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소망의 뜻을 담아 짓는 경우, 본인의 현재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참작하는 경우,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아호로 삼는 경우 등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 본인이 스스로 짓기도 하지만 부모나 스승, 친구가 보통 지어주게 된다. 본인의 품성이나 이미지를 잘 나타내는 아호 하나쯤 가질 만하다. 본명 외에 남의 아호를 하나 더 외우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상대방을 아호로 불러주면 편리할 때도 많다. 팍팍한 세상살이에서 부드럽고 친밀감 있는 인간관계 유지에 도움이 된다.
아호 하나쯤 가지고 서로 불러주는 문화가 형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종휘 전 우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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