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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칼럼] SK이노베이션 노사의 용단

최갑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26 17:02

수정 2018.03.26 17:09

[차장칼럼] SK이노베이션 노사의 용단

제조업으로 부국강병을 이룬 독일도 1990년대 제조업의 큰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독일 기업들은 고임금의 독일을 떠나는 게 붐이었다. 저임금과 생산성이 높은 포르투갈, 슬로바키아 등 인접국에 해외공장을 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기업들이 떠나자 철옹성 같던 독일 경제도 휘청거렸다. 400만명 넘는 고실업에 정부도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급기야 독일 정부는 기업들에 특단의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기업은 없었다. 굳이 값싼 노동력과 골칫거리 노조 문제에서 해방되는 카드를 버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독일 제조업을 구한 건 폴크스바겐이다. 독일 최대 자동차기업인 폴크스바겐은 정부와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물이 '아우토(AUTO) 5000' 프로젝트다. 폴크스바겐이 니더작센주에 신규 투자한 아우토5000 공장은 독일 노사문화에 일대 충격이었다. 아우토5000 공장은 실업자 5000명을 고용해 일자리를 만들었다. 그 대신 임금 수준은 기존 폴크스바겐 근로자의 80% 수준인 월 5000마르크(당시 300만원 수준)로 정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성 노조의 독일 자동차업계에서 임금 후퇴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노조가 기득권을 내려놔서다. 폴크스바겐 노조는 금전적 권리를 양보하는 대신 일자리 창출과 고용불안에서 해방되는 합리적 대안을 선택한 것이다. 아우토5000이 폴크스바겐 노사의 합작품인 이유다. 경영진의 의지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결과였다. 아우토5000은 고임금·저생산성 구조인 독일 제조업 문제의 해법이 됐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일자리 나누기와 혁신적 노사문화의 새 지평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아우토5000에 견줄 만한 노사문화의 혁신적 실험이 있었다. 국내 최대 민간 에너지기업인 SK이노베이션 노사가 지난 15일 올해 1.9% 임금인상에 최종 합의한 것. 노사가 올해 임금교섭 상견례를 한 지 1주일 만에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이 잠정합의안은 90.34%라는 역대 최고의 노조 동의를 얻어냈다. 매년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해를 넘기며 노사분쟁을 반복했던 악습의 고리를 끊어낸 것이다. 그 비결은 SK이노베이션 노사가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에 연동해 임금인상률을 정하는 단체협약의 대타협을 이룬 덕분이다.
2014년 유가 폭락으로 창사 이래 첫 적자와 인력감축의 아픔을 잊지 않은 학습효과이기도 하다. SK이노베이션 노사는 물가연동제 도입에 합의하며 '회사의 미래를 함께 고민한 성과'라고 평했다.
미국과 중국의 엄혹한 무역전쟁 한복판으로 빠져든 지금의 한국 제조기업들에 꼭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SK이노베이션 노사의 용단에 박수를 보낸다.

최갑천 산업부 cgapc@fnnews.com 최갑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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