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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해외 대기획 3탄] 국민 10명 중 1명 이민길…"종이 없어 여권도 못 만들어"

김문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26 17:07

수정 2018.03.27 14:11

[포퓰리즘의 비극 중남미를 가다] <4> 베네수엘라-최악의 엑소더스
가족들 거리서 쓰레기 뒤져 "일하려 해도 받아주지 않아"
스페인 등 대사관앞 장사진, 99년부터 300만명 해외로.. 교수.의사 떠나 사회 붕괴
지난 3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도심 한쪽 쓰레기 더미에서 노숙자 가족들이 음식을 찾고 있다. 이들의 4세, 7세 난 딸들은 부모가 음식은 찾는 동안 다리 난간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김문희 기자
지난 3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도심 한쪽 쓰레기 더미에서 노숙자 가족들이 음식을 찾고 있다. 이들의 4세, 7세 난 딸들은 부모가 음식은 찾는 동안 다리 난간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김문희 기자

카라카스(베네수엘라)=김문희 김유아 기자】 남미 역사상 다시는 없을 가장 큰 엑소더스가 일어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끼니를 이을 식료품도 사기 어려운 지독한 경제위기와 정치적 혼란으로 현지인을 비롯한 해외진출 기업마저도 떠나는 대규모 엑소더스가 이어지고 있다.
한때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베네수엘라는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경제난과 무너진 치안, 물가급등으로 자국민마저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쓰레기 뒤져 연명하는 일상

지난 2일 카라카스 칸델라리아 지역.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로 남자 두 명이 다가갔다. 국물과 기름이 섞여 빵빵해진 비닐봉지에 구멍을 낸 한 남성은 옆에 있는 남성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 남성은 5L 페트병과 깔때기를 들고 오더니 기름을 분리해냈다.

그들을 지켜보던 제리린 수아레스씨(27·여)와 4세, 7세된 두 딸도 쓰레기 더미로 다가갔다. 이 여성은 꽉 묶여있는 비닐을 찢더니 쓰레기 속에서 한 줌 정도 남은 빵 조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수아레스씨는 "청소근로자로 일하던 플라스틱 공장이 문을 닫자 지난해 12월부터 남편과 함께 다리를 지붕 삼아 노숙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어 "쓰레기라고 해도 국수나 밥을 다 구할 수 있어서 연명하고 있다"면서 "일자리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학교에 가지 못한 첫째 딸은 다리 난간에 매달려 놀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쓰레기를 뒤지는 베네수엘라인의 상황은 빈민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깔끔한 핑크색 깅엄체크 와이셔츠를 차려입은 청년이 손에 비닐봉지를 덧씌우고는 쪼그려 앉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도 현지인들에게는 일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식료품을 구하기 어려운 베네수엘라 현지 사정을 확인할 수 있는 반정부 그라피티가 카라카스 도시 전체를 뒤엎고 있다. 지난달 27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시내 한 벽면에 쓰여진 문구.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문구로 '브라보 마두로(Viva Maduro)'에 마두로 대통령의 이름을 삭제한 후 '매우 배고프다(Viva El Hambre)'라고 적혀 있다. 사진=김문희 기자
식료품을 구하기 어려운 베네수엘라 현지 사정을 확인할 수 있는 반정부 그라피티가 카라카스 도시 전체를 뒤엎고 있다. 지난달 27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시내 한 벽면에 쓰여진 문구.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문구로 '브라보 마두로(Viva Maduro)'에 마두로 대통령의 이름을 삭제한 후 '매우 배고프다(Viva El Hambre)'라고 적혀 있다. 사진=김문희 기자

교수·의료진 엑소더스 이어져

지난달 26일 카라카스 소재 주베네수엘라 스페인대사관 앞에는 오전 8시부터 이민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스페인어가 가능한 베네수엘라인들은 우선 언어가 통하는 나라로 이민하는 것이 수월해 스페인을 비롯한 주변 파나마, 콜롬비아, 에콰도르, 멕시코 등으로 많이 이민을 택하고 있다.

현지 교민 전모씨는 "대사관 앞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이민 행렬이 늘어나서기도 하지만 종이 부족으로 여권을 만들지 못해 이민을 위한 서류와 여권을 준비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라면서 "또 예전 베네수엘라가 부국이었을 때 이민을 온 이들 가운데 이중국적을 유지하던 사람들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류를 준비하러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집권하기 시작한 지난 1999년부터 현재까지 엑소더스에 가담한 인구는 약 3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공식 집계는 없다. 그러나 이는 베네수엘라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로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이며, 현재도 이 수치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베네수엘라인 가운데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이들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10명 중 7명에 달했다.

특히 베네수엘라를 떠나는 이들 가운데 교수, 의사, 고위직 반정부 인사 등도 상당수에 이른다.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부재로 대학교와 병원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베네수엘라 센트럴 국립대 재학생인 완 베레즈씨(19)는 "이미 학기는 시작했지만 이민을 위해 학교를 떠나는 교수님들이 너무 많아 매번 학교를 가도 수업이 없다. 배울 기회조차 잃었다"면서 "나라 상태도 좋지 않고 학교 식당 음식상태도 좋지 않아 학교를 가도 소용이 없으니 다른 일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병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페르난도 페레스씨(66)가 근무하는 대형병원의 의료인력은 지난 2013년 대비 절반 가까이 줄었다.

페레스씨는 "엑소더스로 지난 2년간 의료인력이 급격히 줄고 있다"고 말했다.
한 아동병원 의사 에드가르 소티요씨(49)도 "대체할 인력이 없어서 남아있는 의사들이 더 많은 환자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면서 "문제는 졸업한 의대생들조차 모두 외국으로 떠나고 있어 앞으로 베네수엘라 내 의료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gloriakim@fnnews.com 김문희 김유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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